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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차 (출애굽기 1장 ~ 출애굽기 3장)

시내 반도의 모세산 정상에서 바라본 일출, Sara Nabih 촬영, CC BY-SA 4.0

시내 반도의 모세산 정상에서 바라본 일출, Sara Nabih 촬영, CC BY-SA 4.0

30일차 (출애굽기 1장 ~ 출애굽기 3장)

본문

출애굽기 1장

  1. 야곱과 함께 각각 자기 가족을 데리고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2.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3. 잇사갈과 스불론과 베냐민과
  4. 단과 납달리와 갓과 아셀이요
  5.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이 모두 칠십이요 요셉은 애굽에 있었더라
  6.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의 사람은 다 죽었고
  7.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9.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10.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
  11.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12.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13.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켜
  14.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
  15.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16.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18.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 아기들을 살렸느냐
  19.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20.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21.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22. 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

출애굽기 2장

  1.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3.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4.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5.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6.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7. 그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8.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9.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10.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11.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12.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13.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14.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16.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들의 아버지의 양 떼에게 먹이려 하는데
  17.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 떼에게 먹이니라
  18.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 르우엘에게 이를 때에 아버지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
  19. 그들이 이르되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 양 떼에게 먹였나이다
  20. 아버지가 딸들에게 이르되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그 사람을 버려두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라 하였더라
  21. 모세가 그와 동거하기를 기뻐하매 그가 그의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주었더니
  22.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이르되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라 하였더라
  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25.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출애굽기 3장

  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16. 너는 가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돌보아 너희가 애굽에서 당한 일을 확실히 보았노라
  17. 내가 말하였거니와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면
  18.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 하라
  19. 내가 아노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 왕이 너희가 가도록 허락하지 아니하다가
  20.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
  21.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나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22. 여인들은 모두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거류하는 여인에게 은 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의 자녀를 꾸미라 너희는 애굽 사람들의 물품을 취하리라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본문 해설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잇는 사백 년

창세기를 덮고 출애굽기를 펼치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똑같은 이름들입니다. 창세기 46장에서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이 출애굽기 1장 첫머리에 다시 한 줄씩 호명되고, 히브리어 성경은 이 책의 제목을 아예 첫 두 단어에서 따와 셰모트, 곧 이름들이라고 부릅니다. 한 가족의 호적이 한 민족의 출생 신고서로 바뀌는 자리에 우리가 서 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관 하나로 끝났던 이야기가 이제 이백만 명가량의 민족을 이끌고 나오는 역사로 이어집니다.

고대 하애굽의 지도, 나일 삼각주와 주요 도시·유적의 위치, Jeff Dahl 원도를 MinisterForBadTimes가 수정, CC BY-SA 3.0
고대 하애굽의 지도, 나일 삼각주와 주요 도시·유적의 위치, Jeff Dahl 원도를 MinisterForBadTimes가 수정, CC BY-SA 3.0

그 사이에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요? 출애굽기 12장 40절은 사백삼십 년이라고 못 박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타국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라고 미리 알려 주신 그 예고가 그대로 이루어진 셈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모세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모세의 율법"이라 부르셨고, 요한복음 5장 46절에서 “모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라고 증언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록을 전설이나 민족 설화로 읽지 않고,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목격자가 남긴 역사로 읽습니다. 문서설 같은 비평학의 전제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

출애굽은 언제 일어난 일일까요? 성경이 스스로 연대를 밝혀 줍니다. 열왕기상 6장 1절은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시작한 재위 사년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사백팔십 년"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솔로몬 사년은 주전 966년경으로 계산되므로, 여기에 사백팔십 년을 더하면 주전 1446년경이 나옵니다. 사사기 11장 26절에서 입다가 “삼백 년"을 언급하는 대목도 이 계산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 1장의 압제는 그보다 앞선 주전 16세기에서 15세기, 애굽 제18왕조의 전성기에 해당합니다.

카이로 이집트박물관에 있는 메르넵타 석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비문, Webscribe 촬영, CC BY-SA 3.0
카이로 이집트박물관에 있는 메르넵타 석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비문, Webscribe 촬영, CC BY-SA 3.0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라는 표현을 그저 몰랐다는 뜻으로만 읽는 것은 본문의 뜻을 절반도 못 읽는 일입니다. 히브리어 야다는 머리로 아는 지식을 넘어 관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행위를 뜻합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요셉의 공적을 알면서도 모른 체했다는 쪽에 더 가깝습니다.

정치적 배경도 한몫했습니다. 삼각주 동부를 지배했던 셈족계 힉소스 왕조가 쫓겨난 뒤, 애굽 사회에는 외국인 거류민에 대한 뿌리 깊은 경계심이 자리 잡았습니다. 바로의 짧은 연설이 그 공포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우리보다 많고 강하다는 경계, 전쟁이 나면 대적과 합할 것이라는 의심, 이 땅에서 빠져나갈 것이라는 불안이 한꺼번에 묻어 있는 말입니다.

위 사진은 주전 1209년경에 세워진 메르넵타 석비입니다. 애굽 기록 가운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비문으로, 이미 가나안에 자리 잡은 한 백성으로 언급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민족 형성의 역사가 애굽 자신의 기록 속에도 흔적을 남긴 것입니다.

비돔과 라암셋: 국고성 건축

바로의 대책은 세 단계로 번져 갑니다. 처음에는 강제 노동, 다음에는 산파를 통한 은밀한 영아 살해, 마지막에는 전 국민을 동원한 공개 학살이었습니다. 악은 한 번에 완성되지 않고 단계를 밟아 자라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건축한 두 도시의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적어 두었습니다. 국고성이라 번역된 히브리어 미스케노트는 곡식과 무기와 물자를 쌓아 두는 보급 기지를 뜻합니다. 군사 작전과 무역을 위해 삼각주 동부에 세워진 거점 도시였던 것입니다.

오스트리아 고고학연구소가 발굴한 텔 엘다바, 고대 아바리스 지역의 작은 텔과 현대 묘지, Didia 촬영, CC BY-SA 3.0
오스트리아 고고학연구소가 발굴한 텔 엘다바, 고대 아바리스 지역의 작은 텔과 현대 묘지, Didia 촬영, CC BY-SA 3.0

비돔은 애굽어로 피-아툼, 곧 아툼 신의 집이라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라암셋은 피-라메수로, 오늘날 나일 삼각주 동부의 칸티르와 텔 엘다바 일대에 해당합니다. 오스트리아 고고학연구소가 만프레트 비탁의 지휘 아래 수십 년간 이 지역을 발굴했고, 그 결과 셈족계 거주민의 집터와 시리아·팔레스타인 계통 토기, 진흙 벽돌 가옥과 매장지가 층층이 드러났습니다.

복원된 아바리스와 피-라메세스의 평면도, Hervé Tronchère 등 공동 연구, CC BY-SA 4.0
복원된 아바리스와 피-라메세스의 평면도, Hervé Tronchère 등 공동 연구, CC BY-SA 4.0

혹시 라암셋이라는 이름이 주전 13세기 람세스 왕의 이름과 같다는 점이 걸리시나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연대를 흔드는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성경 자신이 창세기 14장 14절에서 아직 생기지도 않은 지명 단을 쓰듯, 독자가 알아볼 수 있는 당대 지명으로 표기를 갱신하는 방식이 고대 문헌의 일반적인 관행이었기 때문입니다.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

본문은 노동의 종류까지 적어 둡니다.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 그리고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었습니다. 나일의 진흙을 밟아 반죽하고 거기에 잘게 썬 짚을 섞어 틀에 넣고 햇볕에 말리는 것이 애굽 벽돌의 제조법이었습니다.

레크미레 무덤의 벽돌 제작 장면을 모사한 그림, 니나 M. 데이비스 작,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CC0
레크미레 무덤의 벽돌 제작 장면을 모사한 그림, 니나 M. 데이비스 작,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CC0

위 그림은 투트모세 3세 때의 재상 레크미레의 무덤 벽화를 니나 데이비스가 정밀하게 모사한 것입니다. 물을 길어 흙을 이기고, 틀에 찍어 벽돌을 말리고, 그것을 메고 나르는 전 과정이 한 폭에 담겨 있습니다. 화면 한쪽에는 막대기를 들고 감독하는 사람이 서 있습니다.

그런데 진흙에 짚을 왜 섞었을까요? 짚이 썩으면서 나오는 유기산이 진흙의 점성을 높여 벽돌이 갈라지지 않게 붙들어 주는 접착제 구실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짚은 사치품이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재료였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해 두시면 다음 장에서 바로가 짚 공급을 끊는 조치가 얼마나 악랄한 계산인지 바로 보일 것입니다.

13절과 14절에 두 번 반복되는 “엄하게"는 히브리어 페렉입니다. 레위기 25장 43절에서 하나님이 동족을 그렇게 다루지 말라고 금하신 바로 그 단어로, 사람을 도구로 갈아 쓰는 혹독한 착취를 가리킵니다. 매튜 헨리는 이 대목에서 애굽이 이스라엘의 몸을 상하게 하려 했으나 하나님은 그 고통을 통해 그들을 한 민족으로 묶으셨다고 풀이합니다.

놀라운 역설이 12절에 있습니다.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사람의 억압이 하나님의 축복을 막지 못합니다. 억누를수록 자라는 생명의 법칙이 여기서 처음 선포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 두 산파

여기서 성경은 아주 뜻밖의 선택을 합니다. 애굽을 다스린 왕의 이름은 끝까지 적지 않으면서, 히브리 산파 두 사람의 이름은 또박또박 기록합니다. 십브라와 부아였습니다.

십브라는 아름다움, 부아는 빛남 또는 소녀와 연결되는 이름으로 이해됩니다. 하나님의 기록 방식은 세상의 방식과 참 다릅니다. 세상이 기억하는 권력자의 이름은 지워지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두 조산원의 이름이 삼천오백 년을 건너왔습니다.

그들은 왜 왕명을 어겼을까요? 본문이 분명히 답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였습니다. 더 큰 두려움이 작은 두려움을 밀어낸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 29절의 고백이 이미 여기서 울립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그 원칙입니다. 두 사람은 왕의 칼보다 하나님의 얼굴을 더 무서워했습니다.

산파들이 바로에게 올린 대답을 두고 거짓말이 아니냐고 묻는 분들도 있습니다. 본문이 칭찬하는 것은 그들의 화술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여 생명을 지킨 믿음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두겠습니다. 성경은 그들의 입이 아니라 그들의 두려움에 상을 주셨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보답은 매우 구체적이었습니다. 21절은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어 바이트는 건물이 아니라 가문과 후손을 뜻하므로, 아기들을 살린 손에 하나님이 자손의 복을 얹어 주신 것입니다.

나일 강에 던지라는 칙령

은밀한 방법이 막히자 바로는 공개 명령으로 돌아섭니다. 아들이 태어나거든 나일 강에 던지라는 칙령이었습니다. 국가 폭력이 전 국민의 손에 쥐어진 순간이었습니다.

이집트의 나일 강 풍경, Menna.Hassan100 촬영, CC BY-SA 4.0
이집트의 나일 강 풍경, Menna.Hassan100 촬영, CC BY-SA 4.0

나일 강은 애굽 사람에게 어떤 존재였을까요? 단순한 강이 아니라 하피라는 신으로 숭배되던 생명의 젖줄이었습니다. 해마다 범람하여 검은 흙을 덮어 주던 그 강이 없으면 애굽 문명 자체가 성립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생명의 강이 유아 살해의 도구로 전락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창세기 3장 15절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음을 봅니다. 여자의 후손을 끊으려는 시도는 가인에게서, 바로에게서, 그리고 훗날 베들레헴의 헤롯에게서 똑같은 수법으로 되풀이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강물에서 구원자를 건져 내십니다. 나일에 던지라는 명령이 떨어진 그 강에서, 바로의 딸이 한 아기를 건져 올려 왕궁에서 기릅니다. 원수의 무기가 하나님의 도구로 뒤집히는 것이 출애굽기의 문법입니다.

갈대 상자, 작은 방주

2장은 아주 평범한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레위 여자에게 장가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름도 아직 나오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6장 20절에 가서야 아므람과 요게벳이라는 이름이 밝혀집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석 달 동안 숨겼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3절은 이것을 믿음의 행위로 평가합니다.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파피루스, 학명 키페루스 파피루스, Kurt Stüber 촬영, CC BY-SA 3.0
파피루스, 학명 키페루스 파피루스, Kurt Stüber 촬영, CC BY-SA 3.0

여기서 반드시 짚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갈대 상자"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테바인데, 이 단어는 구약 전체에서 딱 두 군데에만 쓰입니다. 창세기 6장에서 9장까지 나오는 노아의 방주, 그리고 바로 이 본문입니다.

이것이 우연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심판의 물에서 인류를 건져 냈듯, 이 작은 방주가 살인의 물에서 한 구원자를 건져 냅니다.

요게벳이 상자에 바른 역청과 나무 진도 방주에 칠한 역청과 같은 계열의 재료였습니다. 하나님은 같은 방식으로 두 번 구원하신 것입니다.

위 사진의 파피루스가 바로 그 재료입니다. 이사야 18장 2절이 애굽의 갈대 배를 언급하는 것처럼, 파피루스 줄기를 엮어 만든 작은 배는 나일에서 아주 흔한 물건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당대의 생활 기술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뒤 나머지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물에서 건져낸 아이, 모세

누이 미리암이 멀리 서서 지켜보는 장면은 긴장감이 넘칩니다. 바로의 딸이 상자를 열자 아기가 울었고, 그 울음이 공주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 순간 미리암이 달려 나가 유모를 구해 오겠다고 제안합니다.

나사 MODIS가 2003년 2월 5일에 촬영한 나일 삼각주와 시내 반도, Jacques Descloitres, 퍼블릭 도메인
나사 MODIS가 2003년 2월 5일에 촬영한 나일 삼각주와 시내 반도, Jacques Descloitres, 퍼블릭 도메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친어머니가 국가가 주는 삯을 받으며 자기 아들에게 젖을 먹이는 일이 벌어집니다. 죽이라던 그 왕실의 재정으로 구원자가 양육된 것입니다.

모세라는 이름에는 두 언어가 겹쳐 있습니다. 애굽어로 메스 또는 모세는 아들 혹은 태어난 자를 뜻하는 흔한 작명 요소였고, 히브리어 마샤는 끌어내다, 건져내다라는 동사입니다. 바로의 딸은 애굽식으로 이름을 붙였고, 성경은 그 이름을 히브리어 뜻으로 다시 풀어 줍니다.

왕궁에서 자란 모세는 사도행전 7장 22절의 표현처럼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일에 능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십 세가 되던 해에 그는 동족을 치는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모래에 감춥니다. 스데반은 이 사건을 하나님이 자기 손으로 구원하실 것을 동족이 깨달을 줄로 모세가 생각했다고 풀이합니다.

의도는 옳았으나 방법과 시간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좌우를 살폈을 뿐 위를 보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동족의 한마디에 모든 계획이 무너집니다. 누가 너를 재판관으로 삼았느냐는 말이었습니다.

미디안 광야의 사십 년 수업

도망친 모세가 멈춘 곳은 미디안이었습니다. 미디안은 아카바 만 동편 북서 아라비아 일대를 중심으로 하되, 유목 생활 때문에 시내 반도까지 오가며 활동한 족속입니다. 창세기 25장 2절에 따르면 아브라함과 후처 그두라의 아들 미디안의 후손입니다.

시내 반도의 와디 페이란, 보리스 카르미 촬영, CC BY 4.0
시내 반도의 와디 페이란, 보리스 카르미 촬영, CC BY 4.0

우물가에서 그는 또 한 번 약자를 돕습니다. 일곱 딸을 괴롭히는 목자들을 쫓아낸 일로 그는 제사장 르우엘의 집에 들어가고, 십보라와 결혼하여 게르솜을 낳습니다. 게르솜이라는 이름의 뜻이 그의 심정을 그대로 말해 줍니다.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라는 고백입니다.

이 광야 생활이 얼마나 길었을까요? 사도행전 7장 23절과 30절을 합치면 사십 년입니다. 신명기 34장 7절이 그의 죽음을 백이십 세로 적으므로, 그의 생애는 왕궁 사십 년, 광야 사십 년, 사역 사십 년으로 나뉩니다.

왕궁에서 배운 사십 년은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가르쳤고, 광야에서 보낸 사십 년은 자기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비우는 데 사십 년을 쓰시는 분입니다. 웨슬리는 『구약성서 주해』에서 이 긴 세월을 하나님의 학교라고 불렀습니다.

2장은 네 개의 동사로 마무리됩니다. 들으시고, 기억하사, 돌보셨고, 기억하셨더라. 주인공이 모세에서 하나님으로 완전히 넘어가는 지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부재가 아니었습니다.

떨기나무 불꽃과 거룩한 땅

평범한 하루였습니다. 장인의 양 떼를 치며 광야 서쪽으로 가다가 호렙에 이르렀을 뿐입니다. 호렙은 마름, 황폐함을 뜻하는 이름이며 시내산의 또 다른 호칭입니다.

가시딸기나무, 학명 루부스 상투스, 크시슈토프 지아르네크 촬영, CC BY-SA 4.0
가시딸기나무, 학명 루부스 상투스, 크시슈토프 지아르네크 촬영, CC BY-SA 4.0

떨기나무로 번역된 세네는 광야에 흔한 가시나무를 가리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단어가 시내라는 지명과 발음이 매우 비슷하다는 점입니다. 전통적으로는 위 사진의 루부스 상투스가 그 나무로 지목되어 왔습니다.

시내 반도의 성 카타리나 수도원 아침 풍경, Abraham 촬영, CC BY-SA 4.0
시내 반도의 성 카타리나 수도원 아침 풍경, Abraham 촬영, CC BY-SA 4.0

위 사진은 모세산 북쪽 기슭의 성 카타리나 수도원입니다. 6세기에 세워진 이 수도원은 전승상 떨기나무의 자리를 지켜 왔습니다. 전승의 정확성은 단언할 수 없으나, 이 사건이 실제 지형 위에서 일어난 역사라는 사실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불이 붙었는데도 타서 없어지지 않는 떨기나무. 이 장면이 무엇을 보여 줄까요? 하나님은 아무것도 소모하지 않으시면서 타오르시는 분, 곧 스스로 충족하신 분이심을 보여 줍니다. 동시에 애굽의 불가마 속에서도 소멸되지 않는 이스라엘의 운명을 미리 그려 준 셈입니다.

여기 나타나신 분을 본문은 “여호와의 사자"라고 부르다가 곧 “하나님"과 “여호와"로 바꾸어 부릅니다. 보내심을 받은 분이면서 동시에 하나님 자신이신 이 분은 성육신 이전에 자기를 나타내신 성자로 이해됩니다. 그래서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명령이 뒤따랐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 여호와의 이름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모세가 보인 첫 반응은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질문입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사십 년 전 혈기로 나섰던 사람이 이제는 자기를 완전히 낮추었습니다.

이집트 모세산의 산 중턱에서 정상 쪽을 바라본 모습, Tamerlan 촬영, 퍼블릭 도메인
이집트 모세산의 산 중턱에서 정상 쪽을 바라본 모습, Tamerlan 촬영, 퍼블릭 도메인

하나님의 대답은 모세의 자격을 보강해 주는 쪽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질문의 축을 내가 누구인가에서 누가 함께 계신가로 옮겨 버리신 것입니다.

이어진 모세의 두 번째 질문이 성경 전체의 가장 중요한 계시를 끌어냅니다.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무엇이라 답하겠냐는 물음에 하나님은 에흐예 아셰르 에흐예라고 답하십니다. 개역개정은 이를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로 옮겼습니다.

이 표현은 존재를 뜻하는 동사 하야의 미완료형을 두 번 겹친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나는 나다, 나는 있는 자다, 나는 있을 자다라는 뜻이 함께 담깁니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자존성과,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같으신 불변성, 그리고 지금 여기 함께하시는 언약적 임재가 한 이름에 압축된 셈입니다.

그 이름이 여호와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렇다면 신약에는 이 이름이 어떻게 이어질까요? 주님께서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 이름에 대한 자기 선언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장의 구속사적 위치도 눈여겨보십시오. 하나님은 “내려가서 건져내고 인도하여 데려가려 하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보시고 들으시고 아시고 내려오시고 건지시는 이 순서는 훗날 성자께서 우리를 위해 걸어오신 길의 밑그림입니다.

세대의 흐름에서 보면 이 자리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세대가 시내산의 율법으로 넘어가는 문턱입니다. 애굽에서의 구원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완성되고, 그 어린양은 갈보리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의 약속은 지금도 유효하여, 다시 오실 주님이 세우실 나라에서 문자 그대로 성취될 것입니다.

묵상과 적용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말씀은 하나님의 침묵이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출애굽기 1장과 2장 전반부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장면이 거의 없습니다. 사백 년 동안 하늘이 닫힌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2장 24절과 25절에서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듣고 계셨고, 기억하고 계셨고, 돌보고 계셨습니다. 지금 기도의 응답이 보이지 않는 분들에게 이 네 개의 동사를 그대로 드리고 싶습니다.

구체적으로 이렇게 해 보시기 바랍니다. 응답되지 않은 기도를 날짜와 함께 수첩에 적어 두십시오. 몇 해가 지나 그 목록을 다시 펼치면, 하나님이 침묵하신 것이 아니라 더 좋은 때를 기다리셨다는 증거를 직접 보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적용은 더 큰 두려움이 작은 두려움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십브라와 부아는 왕의 칼을 몰랐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을 더 무서워했기 때문에 왕명을 어길 수 있었습니다.

직장에서 상사가 서류를 조작하라고 지시할 때, 학교에서 모두가 부정에 가담할 때, 우리 안에서도 두 두려움이 싸웁니다. 사람의 눈을 두려워하면 양심을 접게 되고, 하나님의 눈을 두려워하면 고개를 들 수 있습니다. 이번 주에 작은 거짓 하나를 거절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세 번째로 자녀를 지키는 믿음의 자리를 생각해 봅시다. 요게벳은 아들을 숨기고 상자를 만들고 역청을 칠한 뒤, 손을 떼고 강물에 띄웠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 나서 할 수 없는 영역을 하나님께 넘긴 것입니다.

부모의 자리가 이와 같습니다. 밥을 먹이고 기도를 가르치고 교회로 데려가는 일은 우리의 몫이지만, 그 아이의 평생을 붙드시는 일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자녀를 통제하려는 손을 조금 펴고, 그 아이의 이름을 매일 한 번씩 소리 내어 축복해 보시기 바랍니다.

네 번째 적용은 낭비처럼 보이는 세월에 관한 것입니다. 모세의 광야 사십 년은 이력서에 한 줄도 쓸 수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왕궁에서 배운 모든 기술이 소용없게 된 자리에서 그는 양을 쳤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십 년은 버려진 시간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시간에 쓸 사람을 비우고 계십니다. 경력이 끊긴 분, 병상에 오래 누워 계신 분, 수험 생활이 길어진 분에게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실제로 모세가 광야에서 익힌 지리와 목양 기술이 훗날 이백만 명을 인도하는 데 그대로 쓰였습니다. 하나님의 경제에는 버려지는 세월이 없는 법입니다. 지금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성실을 지켜 보십시오.

다섯 번째로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내려놓으십시오. 모세는 자격 미달을 호소했고 하나님은 자격을 보태 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교회에서 봉사를 권유받을 때 우리는 흔히 능력을 계산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묻는 질문은 능력이 아니라 동행의 약속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작은 섬김 하나를 올해 안에 시작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여섯 번째 적용은 은혜와 성화를 함께 붙드는 일입니다. 모세가 떨기나무를 향해 걸어간 것이 아니라, 떨기나무가 먼저 타올랐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전에 먼저 찾아오시는 은혜, 이것이 모든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신을 벗고 선 모세는 그날부터 평생에 걸쳐 빚어졌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는 그 순간에 성화가 함께 시작되고, 하나님이 먼저 일하시므로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순서가 뒤집히면 신앙 전체가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은혜가 먼저이고, 거룩함이 뒤따릅니다. 내 노력으로 은혜를 사려는 마음과, 은혜를 받았으니 거룩함은 필요 없다는 마음을 함께 내려놓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더 큰 출애굽을 바라보십시오. 애굽에서의 구원은 그림자일 뿐, 실체는 어린양의 피로 이루어진 구속입니다. 요한일서 3장 2절과 3절은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는 소망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동력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오늘 우리가 거룩함을 추구하는 이유가 바로 그 소망에 있습니다.

예화

아우슈비츠의 산파: 죽이라는 명령 앞에서

스타니스와바 레슈친스카의 사진, 작자 미상, 퍼블릭 도메인
스타니스와바 레슈친스카의 사진, 작자 미상, 퍼블릭 도메인

십브라와 부아가 왕명을 어기고 아기들을 살린 장면을 읽을 때면 한 폴란드 여인의 이름이 떠오릅니다. 1896년 5월 8일 우치에서 태어난 조산사 스타니스와바 레슈친스카입니다. 목수의 딸로 자라 조산사 자격을 얻은 뒤, 그는 평범하게 아기를 받으며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전쟁이 그 평범한 삶을 가로막았습니다. 독일군이 우치를 점령하고 게토가 세워지자, 레슈친스카 가족은 갇힌 유대인들에게 식량과 위조 서류를 몰래 전달하기 시작합니다. 들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를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1943년 2월 18일, 게슈타포가 그를 체포했습니다. 그해 4월 17일 그는 의대생이던 딸 실비아와 함께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41335번과 41336번이라는 번호를 받습니다. 남편은 다시 만나지 못했고, 1944년 바르샤바 봉기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지옥으로 들어가면서 그는 한 가지를 품고 갔습니다. 조산사 자격을 증명하는 서류를 치약 통 속에 숨겨 들여간 것입니다. 그 종이 한 장 덕분에 그는 여성 수용소의 산실로 배치되었습니다.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 비르케나우 여성 수용소 막사에 남아 있는 벽돌 난로, Geertivp 촬영, 2024년, CC BY-SA 4.0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 비르케나우 여성 수용소 막사에 남아 있는 벽돌 난로, Geertivp 촬영, 2024년, CC BY-SA 4.0

산실이라 불린 그곳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수돗물도 기저귀도 없고 비가 오면 바닥에 물이 차는 막사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해산할 산모를 위 사진처럼 막사 가운데를 지나는 벽돌 난로 위에 눕혔습니다. 불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난로였으나 젖은 바닥보다는 나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명령이 내려옵니다. 태어나는 아기를 죽음에 넘기라는 지시였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거절했고, 수용소 의사 앞에 끌려가서도 다시 거절했습니다.

산파 한 사람이 그 거대한 기계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자기에게 온 아기를 끝까지 제 손으로 받아 냈습니다. 그렇게 받은 해산이 삼천 건가량에 이르렀고, 해산하는 자리에서 목숨을 잃은 산모와 아기는 없었다고 보고됩니다.

그러나 아기들이 맞은 운명은 혹독했습니다. 수용소의 손에 넘겨진 아기들은 물통에서 죽거나 추위와 굶주림으로 숨졌고, 눈이 파란 아기 오백 명가량은 독일인 가정으로 보내졌으며, 어머니 품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아기는 서른 명 남짓이었습니다. 그는 끌려가는 아기들의 몸에 표시를 남겨, 훗날 어머니를 찾게 하려는 애씀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수감자들은 그를 엄마라는 뜻의 마무시아라고 불렀습니다. 1945년 1월 26일 수용소가 해방되자 그는 고향으로 돌아갔고, 1974년 3월 11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1965년 폴란드의 한 의학지에 그가 발표한 「아우슈비츠 산파의 보고서」가 그 산실의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의 교회 전통은 우리와 다른 점이 있어 여기서는 확인된 전기적 사실만 전합니다. 다만 죽이라는 명령 앞에서 그가 선 자리는 삼천오백 년 전 두 산파가 섰던 자리와 똑같았습니다. 더 큰 두려움이 작은 두려움을 밀어낸 셈입니다.

모세라 불린 여인: 해리엇 터브먼의 열세 번의 밤

해리엇 터브먼의 초상 사진, 호레이쇼 시모어 스콰이어 촬영, 1885년경, 퍼블릭 도메인
해리엇 터브먼의 초상 사진, 호레이쇼 시모어 스콰이어 촬영, 1885년경, 퍼블릭 도메인

모세는 왕궁에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왕궁 없이 노예로 태어난 모세도 있었습니다. 1822년경 미국 메릴랜드 도체스터 카운티의 노예 가정에서 태어난 아라민타 로스, 훗날의 해리엇 터브먼입니다.

메릴랜드 벅타운의 상점 건물, 어린 해리엇 터브먼이 머리에 중상을 입은 곳으로 미국 국립공원청이 소개하는 자리, Lorie Shaull 촬영, CC BY-SA 2.0
메릴랜드 벅타운의 상점 건물, 어린 해리엇 터브먼이 머리에 중상을 입은 곳으로 미국 국립공원청이 소개하는 자리, Lorie Shaull 촬영, CC BY-SA 2.0

십 대 어느 날, 그는 위 사진의 벅타운 상점에서 인생이 갈리는 장면을 만납니다. 도망친 노예를 붙들던 감독이 그 사람을 묶는 일을 도우라고 했을 때, 소녀는 손을 내밀지 않고 그냥 서 있었습니다. 화가 난 감독이 집어 던진 두 파운드짜리 쇠 추가 도망자 대신 소녀의 머리로 날아듭니다.

두개골이 깨졌고 몇 주를 앓아누웠습니다. 그 뒤로 평생 갑자기 잠에 빠지는 발작이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그 상처가 그를 무너뜨렸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전기 작가들은 그때부터 그가 꿈과 환상을 보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인도로 여기며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1849년 가을, 그는 홀로 길을 떠납니다. 북쪽으로 구십 마일가량을 걸어 필라델피아에 닿았습니다. 자유를 얻은 그날의 심정을 그는 훗날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나는 선을 넘었다, 나는 자유로웠다, 그러나 자유의 땅에서 나를 맞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타국의 나그네였다는 고백입니다.

이 말이 어디서 들어 본 문장처럼 느껴지지 않나요? 출애굽기 2장 22절에서 모세가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지으며 한 말,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라가 바로 그 문장입니다. 성경을 귀로 외우며 자란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유의 땅에 주저앉지 않습니다. 1850년 도망노예법이 통과되어 북부마저 안전하지 않게 되자, 그는 캐나다까지 길을 늘려 가며 자기가 빠져나온 그 땅으로 되돌아갔습니다. 1851년부터 1862년까지 열세 번가량 남쪽으로 내려가 칠십 명가량을 직접 데리고 나왔고, 오십 명이 넘는 이들에게 도망길을 알려 주었습니다.

밤길을 걷고 늪을 건너는 그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어려서 아버지와 함께 숲에서 목재 일을 하며 익힌 물길과 숲길 지식이 길잡이가 되었다고 전기 작가들은 봅니다. 노예로 보낸 세월조차 버려지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자기 백성의 모세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자기 기차를 선로에서 벗어나게 한 적이 없고 승객을 한 명도 잃지 않았다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열세 번의 밤길에서 단 한 사람도 놓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남북전쟁이 터지자 그는 연방군의 정찰병으로 나섰습니다. 1863년 6월 2일 콤바히강 작전에서 그는 강에 설치된 폭발물을 피해 포함을 안내하여 칠백 명이 넘는 노예를 해방시켰습니다. 미국 역사에서 여성이 지휘한 첫 무장 작전으로 평가되는 일입니다.

그는 1913년 3월 10일 뉴욕 오번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글을 배우지 못한 노예 여인에게 하나님은 자격을 보태 주지 않으시고 동행을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하고 물러섰던 모세의 질문 앞에 주신 그 대답이, 이 여인의 생애에도 그대로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

먼저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응답이 보이지 않는 기도 앞에서도 들으시고 기억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달라고 구합니다. 사람의 눈보다 하나님의 눈을 더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셔서, 작은 거짓과 타협 앞에서 바로 설 수 있기를 간구하고 싶습니다. 낭비처럼 보이는 오늘의 시간이 하나님의 학교임을 깨달아 성실히 걷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가정을 위해서는, 요게벳처럼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한 뒤 자녀를 하나님께 맡기는 부모가 되기를 구하고 싶습니다.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는, 자격을 계산하기보다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을 붙들고 일어서는 지체들이 많아지기를 아룁니다. 한국 사회를 위해서는 태어나는 생명이 환영받는 땅이 되기를, 열방을 위해서는 신앙 때문에 감옥에 갇힌 형제자매들에게 하늘의 위로가 더해지기를 올려 드립니다.

스스로 계신 하나님, 오늘 출애굽기를 열며 주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주님은 사백 년의 침묵처럼 보이는 세월 속에서도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으셨고, 언약을 기억하시며 때를 준비하셨습니다. 그 신실하심 앞에 머리를 숙입니다.

생명을 지키시는 주님, 나일 강에 던져지던 아기들의 울음을 들으시고 그 강에서 구원자를 건져 올리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우리 땅에서도 생명이 짓밟히는 자리마다 주님의 손이 뻗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십브라와 부아처럼 작은 자리에서 생명을 지키는 사람으로 저희를 세워 주시기 바랍니다.

떨기나무 가운데서 말씀하신 주님, 저희가 먼저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저희 앞에서 타오르셨음을 고백합니다. 그 은혜 앞에 신을 벗는 마음으로 엎드리오니, 저희 삶의 평범한 하루를 거룩한 땅으로 바꾸어 주옵소서.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 내가 누구이기에 하고 물러섰던 모세에게 주님은 자격을 더하지 않으시고 동행을 약속하셨습니다. 저희도 능력을 세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의 약속을 세는 자리로 옮겨 가게 하여 주십시오. 맡겨진 작은 섬김을 미루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영원한 이름을 가지신 주님, 어제와 오늘이 같으시고 영원까지 동일하신 주님의 이름을 의지합니다. 애굽에서 건지신 그 손이 갈보리에서 저희를 건지셨음을 믿으며, 다시 오셔서 모든 약속을 완성하실 그날을 바라봅니다. 그날까지 거룩함을 좇아 살기를 원하오니 저희 걸음을 붙들어 주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저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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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퍼런스

  1.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대한성서공회, 1998. 본문 출처: https://www.bskorea.or.kr
  2. Matthew Henry, Commentary on the Whole Bible, Vol. 1 (Genesis to Deuteronomy), 1708–1710;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판 참조. (출 1~3장 주해)
  3. John Wesley, Explanatory Notes upon the Old Testament, Bristol: William Pine, 1765. (출애굽기 1~3장 주해)
  4. John Wesley, Sermon 43: 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 1765. (칭의와 성화의 동시 시작)
  5. John Wesley, Sermon 85: On Working Out Our Own Salvation, 1785. (하나님이 먼저 일하심과 순종의 책임)
  6. C. I. Scofield, ed., The Scofield Reference Bibl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09. (출애굽 연대와 약속의 세대에 관한 주)
  7. Charles C. Ryrie, Dispensationalism, rev. ed., Chicago: Moody Press, 1995.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의 문자적 성취)
  8. John MacArthur, ed., The MacArthur Study Bible, Nashville: Word Publishing, 1997. (출 3:14의 신명과 여호와의 사자에 관한 주)
  9. Walter C. Kaiser Jr., Exodus,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Vol. 2, Grand Rapids: Zondervan, 1990. (출애굽 연대 논의와 왕상 6:1의 계산)
  10. Douglas K. Stuart, Exodus, The New American Commentary 2, Nashville: Broadman & Holman, 2006. (테바와 미스케노트 등 어휘 분석)
  11. James K. Hoffmeier, Israel in Egypt: The Evidence for the Authenticity of the Exodus Tradi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삼각주 동부의 셈족 거주민과 벽돌 노동 기록)
  12. Manfred Bietak, Avaris: The Capital of the Hyksos — Recent Excavations at Tell el-Dab’a, London: British Museum Press, 1996.
  13. K. A. Kitchen, On the Reliability of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2003. (국고성과 지명 표기의 갱신 문제)
  14. Norma Franklin et al. 등이 보고한 메르넵타 석비 연구 및 James K. Hoffmeier, Ancient Israel in Sinai,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메르넵타 석비의 이스라엘 언급)
  15. Nina M. Davies and Alan H. Gardiner, Ancient Egyptian Painting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36. (레크미레 무덤 벽화 모사와 벽돌 제작 장면)
  16. Stanisława Leszczyńska, “Raport położnej z Oświęcimia”, Przegląd Lekarski, 1965년 1호. (아우슈비츠 산실의 기록)
  17. Sydney Jewish Museum, “Did You Know: The Polish Catholic midwife of Auschwitz”, https://sydneyjewishmuseum.com.au (조산사 배치 경위, 수감자들이 부른 호칭, 해산 결과)
  18. Erin Blakemore, “This Midwife at Auschwitz Delivered 3,000 Babies in Unfathomable Conditions”, History.com, 2019. (산실의 환경과 아기들의 통계)
  19. Kate Clifford Larson, Bound for the Promised Land: Harriet Tubman, Portrait of an American Hero, New York: Ballantine Books, 2004. (출생 연도, 벅타운의 부상, 탈출 경로)
  20. Sarah H. Bradford, Scenes in the Life of Harriet Tubman, Auburn: W. J. Moses, 1869. (“나는 선을 넘었다"로 시작하는 고백)
  21. Sarah H. Bradford, Harriet, the Moses of Her People, New York: Geo. R. Lockwood & Son, 1886. (승객을 한 명도 잃지 않았다는 말)
  22. Catherine Clinton, Harriet Tubman: The Road to Freedom, New York: Little, Brown and Company, 2004. (콤바히강 작전과 정찰 활동)
  23. National Park Service, “Harriet Tubman Underground Railroad National Historical Park”, https://www.nps.gov/hatu (벅타운 상점에서 입은 머리 부상)
  24. 이미지 출처(모두 위키미디어 공용에서 크기를 줄여 주소로 임베딩함): 모세산 정상의 일출 사진, Sara Nabih, CC BY-SA 4.0 / 하애굽 지도, Jeff Dahl·MinisterForBadTimes, CC BY-SA 3.0 / 메르넵타 석비 사진, Webscribe, CC BY-SA 3.0 / 텔 엘다바 발굴지 사진, Didia, CC BY-SA 3.0 / 아바리스·피라메세스 평면도, Hervé Tronchère 외, CC BY-SA 4.0 / 레크미레 무덤 벽돌 제작 모사도, 니나 M. 데이비스, 메트로폴리탄미술관, CC0 / 나일 강 풍경 사진, Menna.Hassan100, CC BY-SA 4.0 / 파피루스 사진, Kurt Stüber, CC BY-SA 3.0 / 나일 삼각주 위성 사진, Jacques Descloitres·나사, 퍼블릭 도메인 / 와디 페이란 사진, Boris Carmi, CC BY 4.0 / 루부스 상투스 사진, Krzysztof Ziarnek, CC BY-SA 4.0 / 성 카타리나 수도원 사진, Abraham, CC BY-SA 4.0 / 모세산 중턱 사진, Tamerlan, 퍼블릭 도메인 / 스타니스와바 레슈친스카 사진, 작자 미상, 퍼블릭 도메인 / 비르케나우 여성 수용소 난로 사진, Geertivp, CC BY-SA 4.0 / 해리엇 터브먼 초상 사진, 호레이쇼 시모어 스콰이어, 퍼블릭 도메인 / 벅타운 상점 사진, Lorie Shaull, CC BY-SA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