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차 (창세기 32장 ~ 창세기 34장)
요르단 자르카 부근을 흐르는 얍복강, 창세기 32장 22절과 함께 기록된 매트슨 사진 컬렉션 자료, 퍼블릭 도메인
본문
창세기 32장
-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자기보다 앞서 사자들을 보내며
-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 주 에서에게 이같이 말하라 주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사오며
-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라 하였더니
-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 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 야곱이 거기서 밤을 지내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 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 젖 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
- 그것을 각각 떼로 나누어 종들의 손에 맡기고 그의 종에게 이르되 나보다 앞서 건너가서 각 떼로 거리를 두게 하라 하고
- 그가 또 앞선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누구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의 것은 누구의 것이냐 하거든
- 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하고
- 그 둘째와 셋째와 각 떼를 따라가는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도 에서를 만나거든 곧 이같이 그에게 말하고
-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
- 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창세기 33장
-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들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 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
- 그 때에 여종들이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 레아도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
- 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 에서가 이르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 야곱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
- 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
-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연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리고 있은즉 하루만 지나치게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 청하건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가축과 자식들의 걸음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 에서가 이르되 내가 내 종 몇 사람을 네게 머물게 하리라 야곱이 이르되 어찌하여 그리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
-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창세기 34장
-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더니
-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의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
- 그 마음이 깊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연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고
-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청하여 이르되 이 소녀를 내 아내로 얻게 하여 주소서 하였더라
- 야곱이 그 딸 디나를 그가 더럽혔다 함을 들었으나 자기의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하므로 그들이 돌아오기까지 잠잠하였고
- 세겜의 아버지 하몰은 야곱에게 말하러 왔으며
- 야곱의 아들들은 들에서 이를 듣고 돌아와서 그들 모두가 근심하고 심히 노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야곱의 딸을 강간하여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 곧 행하지 못할 일을 행하였음이더라
- 하몰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 세겜이 마음으로 너희 딸을 연연하여 하니 원하건대 그를 세겜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라
- 너희가 우리와 통혼하여 너희 딸을 우리에게 주며 우리 딸을 너희가 데려가고
- 너희가 우리와 함께 거주하되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여기 머물러 매매하며 여기서 기업을 얻으라 하고
- 세겜도 디나의 아버지와 그의 남자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로 너희에게 은혜를 입게 하라 너희가 내게 말하는 것은 내가 다 주리니
- 이 소녀만 내게 주어 아내가 되게 하라 아무리 큰 혼수와 예물을 청할지라도 너희가 내게 말한 대로 주리라
-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과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속여 대답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그 누이 디나를 더럽혔음이라
- 야곱의 아들들이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는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할례 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우리 누이를 줄 수 없노니 이는 우리의 수치가 됨이니라
- 그런즉 이같이 하면 너희에게 허락하리라 만일 너희 중 남자가 다 할례를 받고 우리 같이 되면
- 우리 딸을 너희에게 주며 너희 딸을 우리가 데려오며 너희와 함께 거주하여 한 민족이 되려니와
- 너희가 만일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곧 우리 딸을 데리고 가리라
- 그들의 말을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이 좋게 여기므로
- 이 소년이 그 일 행하기를 지체하지 아니하였으니 그가 야곱의 딸을 사랑함이며 그는 그의 아버지 집에서 가장 존귀하였더라
-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이 그들의 성읍 문에 이르러 그들의 성읍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 이 사람들은 우리와 친목하고 이 땅은 넓어 그들을 용납할 만하니 그들이 여기서 거주하며 매매하게 하고 우리가 그들의 딸들을 아내로 데려오고 우리 딸들도 그들에게 주자
- 그러나 우리 중의 모든 남자가 그들이 할례를 받음 같이 할례를 받아야 그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여 한 민족 되기를 허락할 것이라
- 그러면 그들의 가축과 재산과 그들의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다만 그들의 말대로 하자 그러면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리라
- 성문으로 출입하는 모든 자가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의 말을 듣고 성문으로 출입하는 그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으니라
- 제삼일에 아직 그들이 아파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버니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몰래 그 성읍을 기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 칼로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오고
- 야곱의 여러 아들이 그 시체 있는 성읍으로 가서 노략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그들의 누이를 더럽힌 까닭이라
- 그들이 양과 소와 나귀와 그 성읍에 있는 것과 들에 있는 것과
- 그들의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들의 자녀와 그들의 아내들을 사로잡고 집 속의 물건을 다 노략한지라
-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 그들이 이르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본문 해설
이름이 바뀌는 밤과 화해의 아침
오늘 본문은 한 사람의 인생이 뒤집히는 하룻밤을 중심에 둡니다. 이십 년을 떠나 있던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백 명을 거느린 형이 마주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밤에 얍복 나루에서 홀로 하나님과 씨름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에 그는 절뚝거리는 다리와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함께 얻어 형을 만나러 걸어갑니다.
창세기 32장은 두려움과 기도와 씨름을, 33장은 화해와 정착을, 34장은 세겜에서 벌어진 참혹한 사건을 적은 장입니다. 세 장을 이어 읽으면 은혜의 절정과 중간에서 멈춘 순종의 대가가 선명하게 맞물립니다.
지리적으로 보면 이 세 장은 요단 동편에서 서편으로 넘어오는 여정입니다. 길르앗 산을 떠나 마하나임과 얍복 나루를 지나고, 요단을 건너 숙곳과 세겜에 이르는 길입니다. 하란에서 세겜까지의 전체 경로는 칠백 킬로미터를 훌쩍 넘습니다.
성경은 왜 이 귀향길을 이렇게 길게 적어 두었을까요? 야곱이 통과한 것은 거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집을 향한 길이 곧 하나님을 향한 길이 되었던 것입니다.
마하나임: 두 진영을 본 자리
1절과 2절은 짧지만 결정적인 장면입니다. 길을 가던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나고 그곳을 마하나임이라 부릅니다. 마하나임은 히브리어로 두 진영 또는 두 군대라는 뜻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 시점에 천군을 보여 주셨을까요? 곧 닥칠 두려움에 앞서 보이지 않는 군대가 함께 있음을 미리 알려 주신 것입니다. 열왕기하 6장 17절에서 엘리사의 종의 눈이 열려 불말과 불병거를 본 장면과 같은 구도입니다.
마하나임은 뒷날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사무엘하 17장 24절에서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길 때 피한 곳이 바로 이 마하나임입니다. 쫓기는 자들이 하나님의 군대를 기억해야 할 땅으로 성경에 새겨진 셈입니다.
사백 명을 거느리고 오는 형

3절에서 야곱은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에게 사자들을 보냅니다. 세일은 사해 남동쪽의 험한 산악 지대이며, 위 사진의 와디 무사와 페트라 일대가 바로 그 지역입니다. 붉은 사암 절벽이 이어지는 땅이니 에돔이라는 이름과 잘 어울립니다.
4절과 5절의 전갈에 야곱의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형을 내 주 에서라 부르고 자신을 주의 종 야곱이라 낮춥니다. 이십 년 전 형의 복을 가로챈 사람이 이제 스스로 종의 자리로 내려간 것입니다.
6절의 보고가 그의 등골을 얼립니다. 에서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오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당시 유목 세계에서 사백 명의 장정은 작은 성읍 하나를 쓸어버릴 수 있는 규모였습니다.
7절은 그의 심정을 두 단어로 적습니다.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군대를 본 바로 다음 장면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이 모습이 우리와 참 닮아 있습니다.
본 것을 어떻게 이렇게 빨리 잊을 수 있나요? 눈으로 본 은혜도 현실의 소식 한 줄에 금세 덮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날마다 새로 붙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두 떼로 나눈 계산과 처음 드린 기도
7절과 8절에서 야곱은 먼저 계산기를 꺼냅니다. 사람과 가축을 두 떼로 나누어 한 떼가 치이면 다른 떼는 피하게 하겠다는 전략입니다. 지혜로운 조치이지만 여전히 사람의 수가 앞섰습니다.
그런데 9절부터 12절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성경이 기록한 야곱의 첫 긴 기도가 여기 등장합니다. 하란에서의 이십 년을 통과하고 형의 군대 앞에 선 그 자리에서 비로소 그의 입이 열린 것입니다.
이 기도의 구조를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을 부르고, 다음으로 돌아가라 하신 그 명령을 근거로 삼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되돌려 아뢰는 기도입니다.
10절은 이 기도의 심장에 해당합니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하는 고백입니다. 여기 은총으로 옮긴 히브리어 헤세드는 언약에 근거한 변함없는 사랑을 뜻합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하는 말입니다. 자기 수고를 자랑하던 사람이 모든 것을 받은 것으로 셈하기 시작했습니다.
11절과 12절은 간구와 근거입니다. 건져 주시기를 구하고, 곧바로 네 씨로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신 약속을 붙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는 기도가 가장 담대한 기도입니다.
예물 오백오십 마리의 긴 행렬
13절부터 21절에는 치밀하게 준비된 예물 목록이 나옵니다. 암염소 이백, 숫염소 이십, 암양 이백, 숫양 이십, 젖 나는 낙타 삼십과 새끼들, 암소 사십, 황소 열, 암나귀 이십, 새끼 나귀 열입니다. 모두 합하면 오백오십 마리가 넘는 큰 재산이었습니다.
야곱은 이것을 한꺼번에 보내지 않습니다. 떼마다 거리를 두어 차례로 보내며, 종들에게 같은 말을 반복하게 했습니다.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라는 말입니다.
왜 이렇게 나누어 보냈을까요? 20절이 그 속내를 알려 줍니다.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는 계산이었습니다. 기도한 사람이 여전히 사람의 수단에도 매달리는 모습입니다.
이것을 꼭 나쁘게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기도했으니 아무 준비도 하지 말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은 아닙니다. 다만 야곱의 마음에는 아직 하나님께 맡긴 평안이 자리 잡지 못했습니다.
얍복 나루의 밤과 어긋난 관절

22절과 23절에서 야곱은 밤에 가족과 소유를 모두 얍복 나루로 건너보냅니다. 얍복은 오늘날 요르단의 자르카 강으로, 길르앗 고원에서 발원해 요단강으로 흘러드는 지류입니다. 위 사진처럼 좁은 협곡과 얕은 여울이 길게 이어집니다.
얍복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 장면의 복선입니다. 히브리어 얍복은 겨루다 또는 씨름하다라는 동사와 소리가 겹칩니다. 그러니 그 밤의 사건은 지명과 사건이 하나로 엮인 기록인 것입니다.
24절의 다섯 글자가 모든 것을 바꿉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라는 말입니다. 가족도 재산도 전략도 모두 저편으로 보낸 뒤, 그는 생애 처음으로 아무것도 없이 혼자 섰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그와 씨름합니다. 이 사람이 누구일까요? 호세아 12장 4절은 그를 천사라 부르고, 야곱 자신은 30절에서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다고 고백합니다.
역사적 기독교 해석은 이 분을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 이전 나타나심으로 읽어 왔습니다. 매튜 헨리와 많은 보수 주석가들이 이 견해를 따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씨름할 수 있을 만큼 낮아지신 것이 이 본문의 놀라움입니다.
25절은 승부의 역설을 보여 줍니다. 그 사람이 야곱을 이기지 못하자 허벅지 관절을 치매 관절이 어긋났습니다. 손가락 하나로 끝낼 수 있는 분이 날이 새도록 버텨 주신 것이니, 이기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이기지 않으신 것입니다.
26절의 야곱의 대답이 그 밤의 결론입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는 외침입니다. 속임수로 복을 얻던 손이 이제 붙들고 매달리는 손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

27절의 질문이 날카롭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는 물음입니다. 모르셔서 물으신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을 스스로 입에 올리게 하려는 물음이었습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발꿈치를 잡는 자, 밀어내는 자, 속이는 자라는 뜻을 함께 지닙니다. 그는 그 밤에 야곱이니이다 하고 대답합니다. 자기 됨됨이를 그대로 시인한 그 짧은 대답이 변화의 문을 열었습니다.
28절에서 새 이름이 주어집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뜻과 하나님과 겨룬다는 뜻으로 함께 풀이됩니다. 한 사람의 이름이 뒷날 한 민족과 한 나라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이상한 점을 느끼지 않으셨나요? 지고 있던 사람에게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하고 말씀하시는 점입니다. 관절이 어긋나 매달릴 수밖에 없게 된 그 상태가 바로 하나님이 인정하신 승리였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설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하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기는 길은 힘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붙드는 것입니다.
브니엘의 해돋이와 절뚝거리는 걸음
30절과 31절은 아침 풍경입니다. 야곱은 그 곳을 브니엘이라 부르는데,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하는 기록이 이어집니다.
이 두 가지가 나란히 놓인 것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해가 돋았다는 것은 이십 년 어둠의 끝을 알리고, 절뚝거림은 그 밤이 남긴 평생의 흔적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에게는 빛과 상처가 함께 남습니다.
32절은 이 사건이 민족의 기억이 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그 힘줄을 먹지 않는다는 기록입니다. 율법에 명문화된 규정이 아니라 조상의 밤을 기리는 관습으로 전해졌습니다.
왜 하나님은 상처를 남기셨을까요? 다리를 절게 된 사람은 더 이상 자기 힘으로 달아날 수 없습니다. 그 절뚝거림이 평생 그에게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지 알려 주는 표지가 된 것입니다.
일곱 번 땅에 굽히며 나아간 사람
33장 1절부터 3절은 숨을 죽이게 하는 장면입니다. 사백 명의 장정이 다가오는 가운데, 야곱은 가족을 뒤에 두고 자기가 앞서 나아갑니다. 전날까지 떼를 나누어 피할 궁리를 했던 사람이 맨 앞에 선 것입니다.
그리고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형에게 다가갑니다. 고대 근동에서 일곱 번의 절은 왕에게 바치는 최고의 경배였습니다. 아마르나 문서에 남은 가나안 성주들의 서신에도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4절은 성경에서 가장 뭉클한 화해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하는 기록입니다. 복수의 칼이 아니라 두 팔이 먼저 뻗어 왔습니다.
사백 명은 무엇이었을까요? 처음부터 호위였을 수도 있고, 응징하러 왔다가 마음이 돌아섰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그 마음을 돌이킨 분은 밤새 씨름하신 그 하나님이셨습니다.
잠언 21장 1절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어 그가 임의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사람의 마음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10절의 야곱의 말이 이 장의 신학적 정점입니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하는 고백입니다. 브니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이, 이제 형의 얼굴에서 같은 은혜를 읽어 냅니다.
이 말을 조금 풀어 보면 이렇습니다. 용서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용서하는 얼굴을 알아봅니다.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이 사람과도 화해할 수 있다는 복음의 순서가 여기 담겨 있습니다.
9절에서 에서는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하고 말하며 예물을 거절했습니다. 야곱은 끝까지 강권하여 받게 합니다. 받는 손과 주는 손이 함께 움직여야 화해가 비로소 매듭지어지는 것입니다.
12절부터 15절은 살짝 어색한 거리를 보여 줍니다. 동행하자는 형의 제안을 야곱은 자식들과 가축을 이유로 정중히 사양합니다. 그리고 세일로 가겠다고 말했지만 그는 세일로 가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신중함으로 볼 수도 있고, 여전히 남은 불신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화해는 이루어졌으나 완전한 신뢰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던 것입니다. 사람의 관계는 한 번의 포옹으로 모든 과거가 지워지지는 않는 법입니다.
그러면 이 화해는 미완성인가요? 그렇게만 볼 일은 아닙니다. 서로를 해치지 않고 각자의 길을 축복하며 헤어졌으니,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분명한 평화였습니다.
숙곳과 세겜: 벧엘에 못 미친 정착

17절에서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집을 짓고 우릿간을 만듭니다. 숙곳은 요단 동편, 얍복강이 요단과 만나는 지역 일대로 추정됩니다. 위 사진처럼 요단강은 폭이 좁은 하천이지만, 그 강을 건너는 일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상징적 경계였습니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장막을 치고 살던 사람이 집을 짓고 우릿간을 지었다는 점입니다. 히브리서 11장 9절은 족장들이 장막에 거주하며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았다고 말하는데, 숙곳의 집은 그 기조에서 한 발 벗어난 선택이었습니다.
18절에서 그는 요단을 건너 세겜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19절에서 그 밭을 백 크시타에 삽니다. 크시타는 성경에 세 번만 나오는 화폐 단위이며, 정확한 가치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4장 5절에 나오는 야곱의 땅이 바로 이 밭입니다.
20절에서 그는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부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엘이시라는 뜻이니, 새 이름을 받은 사람의 신앙 고백이 담긴 이름입니다. 여기까지는 참 좋은 장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곳은 어디였을까요? 창세기 31장 13절에서 하나님은 벧엘의 하나님이라 하시며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벧엘은 세겜에서 남쪽으로 약 오십 킬로미터 더 내려간 곳이니, 야곱은 목적지 앞에서 멈춘 셈입니다.
세겜 성의 비극과 두 아들의 칼

34장은 그 멈춤의 대가를 보여 줍니다. 1절에서 레아의 딸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고, 2절에서 추장의 아들 세겜이 그를 끌어들여 욕되게 한 사건이 터졌습니다. 성경은 이 일을 미화하지 않고 범죄로 분명히 기록합니다.
위 사진은 오늘날 나블루스 동쪽의 텔 발라타, 곧 고대 세겜의 성벽과 성문 유적입니다. 중기 청동기 시대의 거대한 성벽과 성문이 발굴되었으며, 족장 시대에 이미 상당한 규모의 성읍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야곱이 장막을 친 곳이 바로 이 성 앞이었습니다.
3절과 4절은 이상한 전개입니다. 가해자인 세겜이 디나에게 연연하며 사랑하여 아내로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사랑이라 불리는 감정이 범죄를 덮을 수는 없습니다.
5절에서 야곱의 반응이 뜻밖입니다. 그는 소식을 듣고도 잠잠하였습니다. 가장으로서 침묵한 그 공백이 아들들의 칼을 불러들였다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브니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왜 이렇게 무기력했을까요? 한 번의 체험이 평생의 결단력을 보장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어제의 은혜가 아니라 오늘의 순종이 필요합니다.

13절부터 24절에서 아들들은 속여 대답합니다. 할례를 받으면 통혼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는데, 언약의 거룩한 표징을 복수의 수단으로 쓴 것입니다. 하몰과 세겜은 재산을 얻을 욕심에 성읍 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
23절에 세겜 사람들의 속셈이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 그들의 가축과 재산과 그들의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양쪽이 모두 다른 속셈으로 거래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25절부터 29절은 참혹합니다. 제삼일에 상처가 가장 아플 때 시므온과 레위가 성읍을 기습하여 모든 남자를 죽이고, 다른 아들들이 성을 노략했습니다. 누이의 수치를 되갚겠다는 명분이었으나 그 결과는 집단 학살이었습니다.
30절에서 야곱은 두 아들을 책망합니다. 다만 그가 말한 이유가 아프게 다가옵니다. 공의가 무너졌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집안이 위험해졌다는 걱정이었습니다.
31절의 아들들의 반문은 뼈가 있습니다.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 하는 말입니다. 틀린 분노는 아니었지만, 그 분노를 담은 그릇이 칼이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공의와는 길이 달랐습니다.

이 사건의 값은 오래 남았습니다. 창세기 49장 5절부터 7절에서 야곱은 임종의 축복에서 시므온과 레위를 가리켜 그들의 칼을 저주합니다. 두 지파는 뒷날 자기 영토를 온전히 갖지 못하고 이스라엘 가운데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34장은 우리에게 분명한 경고를 남깁니다. 벧엘까지 가지 않고 세겜에 머문 선택이 딸의 비극과 아들들의 살인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순종을 중간에서 멈추면 그 공백에 다른 것이 들어차고 맙니다.
묵상과 적용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말씀은 두려움의 자리에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사백 명의 소식을 듣고 떼를 나누는 계산을 먼저 했지만, 결국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그의 인생을 갈라 놓았습니다.
우리도 문제가 생기면 먼저 계산을 합니다. 통장을 열어 보고 사람을 떠올리고 경우의 수를 따집니다. 계산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계산보다 기도를 먼저 두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닥친 일 앞에서 먼저 연 것이 무엇인가요? 휴대전화였다면 순서를 한 번 바꾸어 보시기 바랍니다. 같은 문제라도 기도를 먼저 통과한 손은 훨씬 덜 떨리는 법입니다.
야곱의 기도를 그대로 본받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먼저 되새기고, 받은 은혜를 셈하고, 구체적으로 간구하고, 다시 말씀을 붙드는 순서입니다. 성경 한 구절을 손에 들고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기도의 결이 달라집니다.
두 번째로 홀로 남는 시간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변화된 자리는 가족도 재산도 전략도 모두 저편으로 보낸 혼자의 자리였습니다.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는 동안에는 좀처럼 바닥까지 내려가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는 하루 가운데 십오 분, 한 주 가운데 한 시간을 아무 소리도 없는 자리로 떼어 놓는 훈련입니다. 휴대전화를 다른 방에 두고 성경과 공책만 들고 앉아 보십시오. 그 조용한 씨름의 시간이 쌓이면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의 이름을 물으십니다.
세 번째로 자기 이름을 정직하게 말하는 용기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새 이름을 주시기 전에 옛 이름을 먼저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회개는 자기 모습을 꾸미지 않고 말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구원의 길에서는 은혜가 먼저 임하고, 그 은혜 안에서 사람이 자기 죄를 보게 되며, 칭의와 중생이 주어지는 그 순간부터 성화가 함께 시작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할 일은 내 이름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내놓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절뚝거림을 부끄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야곱은 축복을 받은 그 밤에 평생의 장애도 함께 얻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에게는 없어지지 않는 흔적이 남습니다.
병을 통과한 분, 사업의 실패를 겪은 분, 관계의 상처를 지고 있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 흔적이 우리를 더 이상 혼자 달리지 못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의지하게 하시는 은혜의 표지입니다.
다섯 번째 적용은 화해의 용기입니다. 야곱은 가족을 뒤에 세우고 자기가 앞에 서서 일곱 번 몸을 굽혔습니다. 화해에는 반드시 먼저 낮아지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5장 24절은 예물을 제단에 두고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떠오르는 한 사람에게 먼저 문자 한 통을 보내 보시기 바랍니다. 밤새 기도한 사람에게는 아침에 걸어갈 힘이 주어집니다.
여섯 번째로 순종을 중간에서 멈추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벧엘로 돌아오라 하셨는데 야곱은 숙곳에 집을 짓고 세겜에 장막을 쳤습니다. 거기서 디나의 비극과 두 아들의 칼이 터져 나왔습니다.
신앙의 결단도 자주 중간에서 멈춥니다. 교회를 옮기려다 멈추고, 끊으려던 습관을 반쯤 끊고, 용서하려다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하나님이 가라 하신 곳까지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입니다.
마지막으로 분노를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시므온과 레위의 분노는 정당한 이유에서 출발했지만, 그 분노가 든 것은 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은 축복이 아니라 흩어짐으로 남았습니다.
로마서 12장 19절은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고 말씀합니다. 억울한 일을 겪은 분들이 분명 계실 것입니다. 그 분노를 하나님의 손에 올려 드리고, 다시 오실 주님이 모든 것을 바로 세우실 날을 기다리며 오늘은 한 걸음 물러서시기 바랍니다.
예화
원수를 아들로 삼은 목사: 손양원
야곱과 에서의 포옹을 읽을 때마다 떠오르는 한국 교회의 실화가 있습니다. 여수 애양원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섬긴 손양원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신사 참배를 거부해 1940년부터 해방될 때까지 오 년 가까이 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비극은 해방 뒤에 찾아옵니다. 1948년 10월, 여수와 순천 일대에서 좌익 무장 봉기가 일어났고, 그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이 끌려갔습니다. 두 청년은 신앙을 버리라는 요구를 거절하고 총살당했습니다.
장례 예배에서 그가 한 말이 지금도 전해집니다. 두 아들을 순교자로 받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열 가지 감사의 고백이었습니다. 자식을 잃은 아버지가 감사를 세는 장면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그 뒤에 일어났습니다. 봉기가 진압된 후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그때 손양원 목사가 그를 살려 달라고 탄원서를 들고 나섰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자식을 죽인 자를 위해 손을 쓸 수 있었을까요? 그는 그 청년이 죽으면 지옥으로 갈 터이니, 살려서 복음을 듣게 해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탄원이 받아들여져 안재선은 석방되었고, 손양원 목사는 그를 양아들로 받아들였습니다. 두 아들을 잃은 집에 그 아들들을 죽인 사람이 아들로 들어온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생애는 1950년에 끝이 납니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피난을 권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는 애양원의 환자들을 두고 떠날 수 없다며 남았습니다. 그해 구월, 여수 근처에서 총살당해 순교의 길을 갑니다.
안용준 목사가 이 이야기를 정리해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제목으로 펴냈고, 그 책이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야곱은 형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했는데, 안재선은 자기를 아들이라 부르는 그 얼굴에서 같은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자기 죄를 먼저 말한 사람: 1907년 평양의 밤

야곱이 자기 이름을 그대로 말한 장면은 한국 교회의 한 밤을 떠올리게 합니다.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난 사경회의 일입니다. 선교사 윌리엄 블레어와 그레이엄 리가 그 현장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위 사진이 당시의 장대현교회입니다. 천오백 명 넘게 모이는 당시 조선 최대의 교회였고, 사경회 저녁 집회에는 사람들이 바닥까지 가득 앉았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변화는 한 사람의 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교회의 지도자였던 길선주가 일어나, 세상을 떠난 친구가 자기에게 재산 관리를 맡겼는데 그 돈 가운데 일부를 자기 것으로 삼았다고 공개적으로 자백합니다. 그리고 이튿날 그 돈을 돌려주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자백이 어떤 무게였을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수백 명이 보는 자리에서 존경받던 지도자가 자기를 도둑이라 말한 것입니다. 체면을 생명처럼 여기던 당시 조선 사회에서 그것은 사회적 죽음에 가까운 고백이었습니다.
그 밤에 집회가 무너집니다. 블레어는 그날의 광경을 두고, 사람들이 통곡하며 차례로 일어나 자기 죄를 쏟아 놓았다고 기록했습니다. 밤이 깊어도 자백이 끊이지 않아 선교사들이 집회를 멈출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어진 변화는 구체적이었습니다. 훔친 물건을 돌려주는 사람들이 줄을 섰고, 미워하던 사람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는 일이 잇따랐으며, 상점 주인들은 속여 팔았던 값을 갚았습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가 평양 대부흥이라 부르는 사건의 시작입니다.
이 부흥이 왜 그렇게 오래 기억되는 걸까요? 감정이 뜨거웠기 때문이 아니라 삶이 실제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회개는 늘 돌려주는 손과 찾아가는 발을 만들어 냅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그 부흥의 출발점입니다. 뜨거운 설교나 조직적인 전도 계획이 아니라, 한 사람이 자기 이름을 정직하게 말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얍복에서 야곱이니이다 하고 대답한 그 한마디가 새 이름의 문을 열었던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같은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우리를 꾸며진 모습이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 부르시고, 그 정직한 고백 위에 새 이름을 얹어 주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더 큰 집회가 아니라 더 솔직한 한마디일 것입니다.
기도
먼저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두려움이 몰려올 때 계산보다 기도를 먼저 붙드는 사람이 되기를 구하며, 홀로 남아 주님과 씨름하는 시간을 날마다 떼어 놓기를 간구합니다. 아울러 꾸미지 않은 우리 이름을 주님 앞에 그대로 말하는 정직을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가정을 위해서는, 아버지의 침묵이 자녀의 상처가 되지 않도록 바른 말을 제때 하는 집이 되기를 구합니다.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는, 평양의 그 밤처럼 지도자가 먼저 자기 죄를 말하고 함께 울 수 있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이 사회가 분노를 칼로 갚으려는 자리에서 공의를 주님께 맡기는 성도들이 세워지기를, 그리고 상처 입은 이들을 품는 열방의 교회들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아룁니다.
얍복의 밤에 사람의 모습으로 낮아져 씨름해 주신 하나님, 오늘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주님은 손가락 하나로 끝낼 수 있는 분이시면서도 날이 새도록 저희를 붙들어 주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그 낮아지심을 생각하며 감사의 마음으로 엎드립니다.
지팡이 하나로 요단을 건넌 자에게 두 떼를 이루게 하신 주님, 저희가 가진 모든 것이 받은 것임을 고백합니다. 제 수고를 세며 스스로 높아지던 마음을 용서하여 주시고, 은총과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다는 그 고백을 저희 입에도 담아 주옵소서.
새 이름을 주시는 주님, 저희의 옛 이름을 숨기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속이고 밀어내던 손을 주님 앞에 펴 보이게 하시고, 당신이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지 아니하겠다는 그 간절함으로 매달리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절뚝거림을 남기신 주님, 저희에게 남은 흔적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그 상처가 저희를 다시 제 힘으로 달리지 못하게 한다면, 그것이 주님을 의지하게 하시는 은혜인 줄 알게 하여 주옵소서.
벧엘로 돌아오라 하신 주님, 저희가 숙곳과 세겜에서 멈추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가라 하신 곳까지 가는 순종을 주시고, 분노를 칼로 갚으려는 손을 내려놓게 하시며, 다시 오실 주님이 모든 것을 바로 세우실 그 날을 바라보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먼저 낮아져 화해의 한 걸음을 내딛겠습니다. 이 모든 말씀을 저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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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퍼런스
-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대한성서공회, 1998. 본문 출처: https://www.bskorea.or.kr
- Matthew Henry, Commentary on the Whole Bible, Vol. 1 (Genesis to Deuteronomy), 1708–1710;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판 참조. (창 32~34장 주해, 얍복의 씨름에 관한 주)
- John Wesley, Explanatory Notes upon the Old Testament, Bristol: William Pine, 1765. (창세기 32~34장 주해)
- John Wesley, Sermon 43: 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 1765. (칭의와 성화의 동시 시작)
- Henry M. Morris, The Genesis Record: A Scientific and Devotional Commentary on the Book of Beginnings,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76.
- C. I. Scofield, ed., The Scofield Reference Bibl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09. (이스라엘이라는 이름과 언약의 문자적 성취에 관한 주)
- John MacArthur, ed., The MacArthur Study Bible, Nashville: Word Publishing, 1997. (창 32~34장 주)
- Kenneth A. Mathews, Genesis 11:27–50:26, The New American Commentary 1B, Nashville: Broadman & Holman, 2005.
-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95. (얍복과 브니엘의 지명 연구)
- Edward F. Campbell Jr. and G. Ernest Wright, “Tribal League Shrines in Amman and Shechem,” The Biblical Archaeologist, Vol. 32, No. 4 (1969), pp. 104–116. (세겜 텔 발라타 발굴 보고)
- G. Ernest Wright, Shechem: The Biography of a Biblical City, New York: McGraw-Hill, 1965.
- William Newton Blair and Bruce F. Hunt, The Korean Pentecost and the Sufferings Which Followed,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77.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 사경회와 길선주의 공개 자백 기록)
- 안용준, 『사랑의 원자탄』, 서울: 성약출판사, 1949년 초판 이후 여러 판. (손양원 목사의 생애와 두 아들의 순교, 안재선의 입양)
- 이상규, 『한국 교회 역사와 신학』, 서울: 생명의양식, 2007. (손양원과 평양 대부흥에 관한 사료 정리)
- 이미지 출처(모두 위키미디어 공용에서 크기를 줄여 주소로 임베딩함): 자르카 부근 얍복강 사진, 매트슨 컬렉션, 퍼블릭 도메인 / 툴룰 아드 다하브와 얍복강 사진, E. Rehfeld, CC BY-SA 3.0 / 와디 무사 산지 사진, Vyacheslav Argenberg, CC BY 4.0 / 들라크루아의 씨름하는 야곱, 퍼블릭 도메인 / 요단강 카스르 알야후드 사진, Fallaner, CC BY-SA 4.0 / 텔 발라타 성벽과 성문 사진, TrickyH, CC BY-SA 4.0 / 세겜과 그리심산 사진, 오리건주립대 특별소장자료, 이용 제한 없음 / 세겜 고대 도시 유적 사진, Daniel Ventura, CC BY-SA 4.0 / 길선주 목사 사진, 퍼블릭 도메인 / 평양 장대현교회 사진, 퍼블릭 도메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