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차 (창세기 16장 ~ 창세기 18장)
네게브 사막 친 골짜기의 엔 아브닷 샘, 이스라엘, Godot13 촬영, CC BY-SA 4.0
본문
창세기 16장
-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창세기 17장
-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포피를 베었으니
- 아브라함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구십구 세였고
-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십삼 세였더라
- 그 날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태어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
창세기 18장
-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 오십 의인 중에 오 명이 부족하다면 그 오 명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온 성읍을 멸하시리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사십오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 아브라함이 또 아뢰어 이르되 거기서 사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사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면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내가 감히 내 주께 아뢰나이다 거기서 이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이십 명으로 말미암아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본문 해설
십 년을 기다린 뒤에 찾아온 조급함
어제 우리는 쪼갠 고기 사이로 홀로 지나가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횃불이 지나간 그 밤의 감격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되는데, 오늘 본문은 그 감격 뒤에 찾아온 기나긴 침묵의 시간에서 시작합니다. 16장 3절은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이 지났다고 못 박아 두었습니다.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시겠다던 약속을 받은 사람이 아직 아이 하나 없이 늙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가장 큰 시험은 무엇일까요? 대개 고난이 아니라 지연입니다. 하나님이 안 된다고 하시면 차라리 포기라도 하겠는데, 하신다고 해 놓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사람의 마음은 견디기 어려워지는 법입니다.
오늘 본문의 세 장이 바로 그 기다림의 한복판을 지나갑니다.
16장은 사람이 앞질러 간 이야기이고, 17장은 십삼 년의 침묵 끝에 하나님이 다시 찾아오신 이야기이며, 18장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벌어진 놀라운 식사와 중보의 이야기입니다. 세 장을 함께 읽으면 하나님의 때와 사람의 때가 어떻게 어긋나고 또 어떻게 만나는지 한눈에 보입니다.
사래의 제안과 고대 근동의 관습

16장 1절은 담담하게 사실을 적습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애굽 사람 여종 하갈이 있었다는 문장입니다. 하갈이 애굽 사람이라는 점을 흘려보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12장에서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바로에게서 받은 노비 가운데 하나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애굽에서 묻혀 온 먼지 한 톨이 십 년 뒤 집안을 뒤흔드는 폭풍이 된 셈입니다. 믿음 없이 내디딘 걸음은 그때 끝나지 않고 두고두고 열매를 맺기 마련입니다.
2절에서 사래가 제안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하는 말이며, 아브람은 사래의 말을 들었습니다. 오늘 우리 눈에는 충격적인 제안이지만, 당시 근동에서는 낯선 일이 아니었습니다.
함무라비 법전 제146조가 이 관습을 그대로 다룹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여종을 주어 자식을 얻게 했는데 그 여종이 아이를 낳고 안주인과 동등해지려 하면 다시 여종의 신분으로 돌릴 수 있다는 조항입니다. 메소포타미아 북부 누지에서 나온 토판들도 대를 잇기 위한 대리 출산 계약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사래의 선택은 문화적으로 합법적이었으니 괜찮은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는 법이 아니라 방향이었고,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하신 일을 사람이 대신 처리하려 한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창세기 3장의 문장 구조가 여기서 소름 끼치도록 되풀이됩니다. 아내가 권하고 남편이 그 말을 듣고 결과를 떠안는 순서입니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하는 2절의 표현은 창세기 3장 17절의 네 아내의 말을 듣고라는 구절을 그대로 닮았습니다.
하갈의 도망과 술 길의 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하갈이 임신하자 여주인을 멸시했고, 사래는 모든 책임을 아브람에게 돌렸으며, 아브람은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행하라 하고 손을 떼어 버립니다. 그래서 사래가 하갈을 학대했고 하갈은 도망쳤습니다.
세 사람 모두 잘못했다는 점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래는 하나님을 앞질렀고 하갈은 교만해졌으며, 아브람은 가장의 자리에서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한 번의 조급함이 집안 전체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7절에서 하갈이 도망친 방향이 나옵니다.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이라고 적혀 있는데, 술은 애굽으로 이어지는 길목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녀는 고향 애굽을 향해 걷고 있던 것입니다.
그 광야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그녀를 만났습니다. 여기 쓰인 말라크 여호와, 곧 여호와의 사자는 단순한 천사가 아닙니다. 13절에서 하갈이 그분을 가리켜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불렀으니, 성경 스스로 그분을 여호와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자를 구약에 나타나신 그리스도로 이해합니다. 성육신 이전에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사건을 신학에서는 현현이라고 부릅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 첫 등장이 족장이나 왕이 아니라 쫓겨난 애굽 여종 앞이었다는 점입니다.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엘 로이

8절의 첫 질문이 참 다정합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하는 물음입니다. 그 광야에서 아무도 그녀의 이름을 불러 준 적이 없었을 텐데, 하나님은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거셨습니다.
하갈의 대답은 반쪽짜리였습니다. 어디서 왔는지는 말했지만 어디로 가는지는 끝내 답하지 못합니다. 쫓기는 사람의 마음이 늘 그렇듯, 떠나온 곳은 분명해도 가야 할 곳은 흐릿했던 것입니다.
9절의 명령은 쉽지 않습니다.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학대를 정당화하신 것이 아니라 약속이 흘러가는 자리로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명령에 10절과 11절의 약속을 함께 묶어 주셨습니다.
11절에서 아들의 이름이 미리 주어집니다. 이스마엘이며, 그 뜻은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말입니다. 이유도 함께 밝히십니다.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기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여기서 꼭 짚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갈은 기도했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저 울며 걸었을 뿐인데, 하나님은 소리 내지 않은 고통까지 들으셨습니다.
13절은 성경 전체에서 아주 특별한 장면입니다. 하갈이 하나님께 이름을 붙여 드리는데, 그 이름이 엘 로이, 곧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 이름을 붙인 사람은 이 여인 한 사람뿐입니다.
이방인 여종이, 쫓겨난 임신부가, 사회에서 가장 약한 자리에 있던 사람이 그 이름을 지었다는 사실이 무엇을 말해 줄까요? 하나님은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 계신 분이라는 선언입니다. 14절은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다고 적는데, 나를 살피시는 살아 계신 이의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들나귀 같은 사람 이스마엘

12절의 예언은 다정하지만은 않습니다.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욥기 39장에서 보았듯 들나귀는 사람이 길들일 수 없는 짐승이었습니다.
이 표현이 저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광야에서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고 살아갈 자유롭고 강인한 민족이 된다는 뜻이며, 실제로 이스마엘의 후손은 아라비아 사막의 유목 부족들로 퍼져 나갔습니다.

15절과 16절이 장을 맺습니다. 하갈이 아들을 낳았고 아브람이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였으며, 그때 아브람의 나이가 팔십육 세였다는 기록입니다. 위 그림은 창세기 21장에서 하갈과 이스마엘이 집을 떠나는 뒷이야기를 그린 작품인데, 오늘 본문의 선택이 어떤 아픔으로 이어지는지 미리 보여 줍니다.
십삼 년의 침묵 뒤에 오신 전능한 하나님
17장 1절은 숫자 하나로 긴 세월을 알려 줍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라는 문장입니다. 16장 마지막이 팔십육 세였으니 그 사이에 십삼 년의 공백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 십삼 년 동안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방법으로 아들을 얻은 뒤 하늘이 조용했던 세월입니다. 우리 삶에도 그런 시기가 찾아오는데, 그 침묵은 버림이 아니라 기다림일 때가 많습니다.
침묵을 깨고 나타나신 하나님은 자신을 새 이름으로 소개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하시는데, 히브리어로 엘 샤다이입니다. 성경에서 이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자리가 바로 여기입니다.
왜 하필 이 시점에 이 이름을 밝히셨을까요? 아브람의 몸과 사라의 태가 완전히 끝난 그 자리에서, 사람의 능력이 다한 곳이 하나님의 능력이 시작되는 곳임을 알려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명령도 분명합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말씀입니다.
완전하라는 말이 부담스럽게 들리시나요? 여기 쓰인 히브리어 타밈은 흠 없는 완벽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께 향해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온전함, 곧 마음과 삶이 사랑으로 가득 차 하나님께로 기울어진 상태가 바로 이것입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5절에서 이름이 바뀝니다. 아브람은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이고 아브라함은 여러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자식이 하나뿐인 아흔아홉 살 노인에게 이 이름은 민망하기까지 한 선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미래를 현재형으로 말씀하십니다. 네가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 하지 않으시고 이미 되게 하였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4장 17절이 이를 두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렇게 말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분에게는 약속한 순간이 곧 이루어진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15절에서는 아내의 이름도 바뀝니다. 사래에서 사라로 바뀌는데, 사라는 공주라는 뜻이며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리라는 약속이 따라붙습니다. 부부가 함께 새 이름을 받았다는 사실이 이 언약의 성격을 잘 보여 줍니다.
7절과 8절의 표현도 눈여겨보셔야 하겠습니다. 영원한 언약이라는 말과 영원한 기업이라는 말이 나란히 쓰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의 약속이 취소되었거나 교회로 대체되었다고 보지 않으며, 다시 오실 주님이 세우실 나라에서 문자 그대로 성취될 것을 기다립니다.
언약의 표징인 할례

10절부터 14절은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명하는 대목입니다. 할례 자체는 이집트를 비롯한 여러 고대 문화에 있던 관습이며, 위 사진의 사카라 부조가 그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기에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담아 주십니다.
이집트에서는 성인이 되는 통과 의례였지만, 하나님은 난 지 팔 일 만에 행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아기가 스스로 선택하거나 공을 세울 수 없는 시기이니, 이 언약이 사람의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몸에 새기는 표였습니다.
몸의 가장 은밀한 곳에 표를 새기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남에게 자랑할 수 없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표지는 남이 보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만 보시는 곳에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여기 담겨 있습니다.
신명기 10장 16절과 예레미야 4장 4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음에 할례를 받으라고 요구합니다. 로마서 2장 29절은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이 참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하다고 선언합니다. 골로새서 2장 11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다고 말하니, 세례가 오늘의 언약 표지가 된 셈입니다.
17절의 장면도 솔직해서 좋습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겠느냐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웃음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웃음을 아들의 이름으로 삼으셨습니다.
19절에서 아들의 이름이 주어집니다. 이삭이며, 그는 웃는다는 뜻입니다. 불신의 웃음을 기쁨의 웃음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유머가 이 이름 하나에 담겨 있습니다.
18절에서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한다고 아룁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단호하면서도 더없이 따뜻한 말씀입니다. 언약은 이삭과 세우겠다고 분명히 선을 그으시면서도, 20절에서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하시며 그에게도 복을 약속하십니다.
23절부터 27절은 순종의 기록입니다. 이 날에 아브라함이 아들 이스마엘과 집안의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아흔아홉 살 노인이 미루지 않고 그날로 순종했다는 점이 이 장의 마지막 울림입니다.
마므레의 세 사람과 아브라함의 환대

18장은 장면 묘사부터 생생합니다. 날이 뜨거울 때에 아브라함이 장막 문에 앉아 있었다는 1절입니다. 팔레스타인의 한낮은 사람과 짐승이 모두 그늘로 숨는 시간이니, 아무도 길을 다니지 않을 시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눈을 들어 보니 사람 셋이 서 있었습니다. 아흔아홉 살 노인이 한 행동이 2절에 적혀 있습니다.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혔다는 기록입니다.
이 장면에서 무엇이 느껴지시나요? 할례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몸으로 달려 나갔다는 점에서 환대를 향한 뜨거운 열심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말과 행동의 차이도 재미있습니다. 그는 물을 조금, 떡을 조금 가져오겠다고 말해 놓고는 고운 가루 세 스아를 반죽하게 하고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습니다. 세 스아는 약 이십 리터가 넘는 양이니, 수십 명이 먹을 분량입니다.
적게 말하고 크게 대접하는 이 태도가 곧 성경이 말하는 환대의 본보기가 됩니다. 히브리서 13장 2절이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하고 권하는데, 바로 이 장면을 염두에 둔 말씀입니다.
세 사람 가운데 한 분은 여호와이셨습니다. 13절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하고 분명히 밝히고, 22절은 나머지 두 사람이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다고 적습니다. 19장 1절에서 소돔에 도착한 두 사람이 천사라고 불리니, 세 분 가운데 한 분은 성육신 이전의 주님이시고 두 분은 천사였던 것입니다.
사라의 웃음과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
10절에서 약속에 날짜가 붙습니다.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십삼 년을 침묵하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기한을 못 박으십니다.
장막 문 뒤에서 그 말을 들은 사라가 속으로 웃었습니다. 11절과 12절은 그 웃음의 이유를 담담히 적습니다. 두 사람 모두 늙었고 사라에게는 생리가 끊어졌으니, 몸으로 보면 이미 끝난 일이었습니다.
13절에서 하나님이 그 속웃음을 들추십니다. 사라가 왜 웃었느냐고 물으시고, 14절에서 욥기 42장 2절과 나란히 놓을 만한 한 문장을 주십니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여기 능하지 못한 일로 옮긴 히브리어 팔라는 본래 너무 놀라워서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일을 뜻합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사람에게는 기적이지만 하나님께는 평범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15절에서 사라가 두려워 부인하자 주님은 짧게 답하십니다.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꾸짖음에도 저주가 없고, 히브리서 11장 11절은 훗날 사라를 믿음의 사람으로 기록합니다.
소돔을 향한 중보, 오십에서 열까지

17절에 담긴 하나님의 독백은 참으로 따뜻한 말씀입니다.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하시는 물음이며, 19절은 그를 택하신 목적이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는 데 있다고 밝힙니다. 이사야 41장 8절이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벗이라 부르는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계획을 미리 알려 주셨을까요? 중보할 기회를 주시려는 것입니다. 심판을 예고하시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마음은 구원할 길을 찾고 계셨습니다.
23절부터 32절은 성경에서 가장 담대한 흥정입니다. 의인 오십 명이 있으면 어찌하시겠느냐는 물음으로 시작해 사십오, 사십, 삼십, 이십을 거쳐 열 명까지 내려갑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한 번도 물리치지 않으시고 그러겠다고 답하십니다.
눈여겨볼 것은 아브라함의 태도입니다. 27절에서 그는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하고 자기를 낮추고, 30절과 32절에서는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하면서 조심스럽게 나아갑니다. 겸손과 담대함이 함께 있는 기도의 본보기입니다.
25절의 고백이 이 대목의 중심입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하는 물음인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성품 자체를 붙들고 간구했습니다. 좋은 중보 기도는 내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뿌리를 둡니다.

그런데 왜 열 명에서 멈추었을까요? 성경은 이유를 밝히지 않지만, 롯의 가족과 그 사위들을 합하면 대략 그 정도 수였기 때문이라고 보는 주석가들이 많습니다. 결국 소돔에는 의인 열 명이 없었고, 하나님은 성을 멸하시되 롯과 그 가족은 건져 내셨습니다.
33절은 조용한 마무리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다는 문장입니다. 중보자는 결과를 손에 쥐지 못한 채 돌아갔지만, 그 기도가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음 장에서 보게 됩니다.
묵상과 적용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을 사람의 방법으로 앞지르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사래의 제안은 당시 문화에서 합법이었고 상식적이었으며 효율적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합리적인 한 걸음이 사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 중동의 긴장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응답이 늦어질 때 사람들은 편법을 찾고 지름길을 만듭니다. 사업이 어려울 때 장부를 손보고 싶은 유혹, 자녀의 입시 앞에서 믿음의 원칙을 잠시 접어 두고 싶은 마음, 결혼을 서두르느라 신앙의 기준을 낮추는 선택이 모두 하갈을 부르는 결정입니다.
그러니 오늘 한 가지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가 밀어붙이려는 그 일이 하나님이 하시도록 기다려야 할 일은 아닌지 돌아보는 일입니다. 기다림은 게으름이 아니라 가장 적극적인 믿음의 행동입니다.
두 번째로 엘 로이의 하나님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하갈은 기도조차 하지 못한 사람이었고, 신분으로나 국적으로나 언약 밖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 광야까지 찾아가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도 하갈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이름조차 불리지 않는 분, 직장에서 성과로 환산되지 않는 자리에 있는 분, 가정에서 늘 뒤에 서 있는 분입니다.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남을 살피는 사람이 되기 마련이니, 이번 주에 그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 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적용은 침묵의 시간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삼 년 동안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침묵이 끝났을 때 하신 첫마디는 책망이 아니라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자기 소개였습니다.
응답이 없는 계절을 지나고 계신 분께 말씀드립니다. 하늘이 조용하다고 해서 하나님이 떠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침묵은 사람의 가능성이 완전히 끝나기를 기다리시는 시간일 때가 많고, 하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일하기를 기뻐하십니다.
네 번째로 할례의 의미를 오늘의 언어로 옮겨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아기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드렛날에 표를 새기게 하셨습니다. 구원은 내가 이룬 결과가 아니라 받은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같은 장에서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명하셨고, 신명기와 예레미야는 마음의 할례를 요구합니다. 은혜로 시작된 구원이 마음의 성화로 이어져야 한다는 성경의 강조가 바로 이 지점에 서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이렇게 적용해 보십시오. 남이 보는 봉사와 헌신 못지않게 아무도 모르는 자리에서의 정직과 절제를 점검하는 일입니다. 하나님만 보시는 자리의 삶이 신앙의 진짜 표지입니다.
다섯 번째로 아브라함의 환대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는 한낮의 더위에도 달려 나갔고, 적게 말하고 크게 대접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식탁에는 누군가를 들일 자리가 남아 있나요? 한 달에 한 번이라도 혼자 밥 먹는 지체를 집으로 초대하는 일이 이 본문을 사는 아주 구체적인 길입니다.
마지막으로 중보의 자리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을 위해 여섯 번이나 간구했고, 하나님은 한 번도 그를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그 중보가 롯의 가족을 건져 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오늘 우리 가정과 교회와 이 나라를 위해 열 명의 의인이 되어 주는 자리에 서시기 바랍니다.
예화
런던 동쪽 끝에서 멈춘 발걸음
1865년 여름 런던이었습니다. 서른여섯 살의 감리교 순회 설교자 윌리엄 부스가 이스트엔드의 화이트채플 거리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는 정해진 교회 없이 떠돌며 집회를 인도하던 중이었고, 그날도 어느 천막 집회에서 설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가 그날 밤 본 풍경은 참으로 참혹합니다. 선술집 문 앞에 널브러진 사람들, 맨발로 구걸하는 아이들, 몸을 팔아 하루를 연명하는 여인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런던 동쪽 끝은 산업혁명이 남긴 가장 어두운 그늘이었고, 그곳 사람들은 어느 교회에도 속해 있지 않았습니다.

위 판화는 그로부터 이십여 년 뒤에 같은 지역의 노숙 실태를 그린 그림입니다. 당시 점잖은 교회들은 이런 사람들이 예배당에 들어오는 것을 반기지 않았습니다. 옷차림과 냄새와 말투가 다르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집에 돌아온 부스는 아내 캐서린에게 그날 본 것을 쏟아 놓았습니다. 전기 작가들이 전하는 그의 말은 짧고 단호합니다. 나는 내 사역지를 찾았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안정된 목회지를 제안받고 있던 그가 런던에서 가장 가난한 거리를 택한 순간이었습니다.

캐서린의 반응이 더 놀랍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말리지 않았고, 우리는 주님을 믿고 그 일을 하자는 뜻으로 함께 결단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동런던 기독교 선교회가 1878년에 이름을 바꾸니, 그것이 오늘의 구세군입니다.
부스 부부가 세운 원칙은 단순했습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설교하기 전에 먼저 수프를 주고 그다음 비누를 주고 그다음 구원을 전한다는 순서였습니다. 하갈을 광야에서 먼저 찾아가신 하나님,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 계셨던 엘 로이의 하나님이 이 부부를 통해 런던 동쪽 끝에서 다시 일하신 것입니다.
숲속에서 무릎으로 보낸 밤
또 한 사람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북미 원주민 선교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입니다. 신학적으로는 뉴잉글랜드 청교도 전통에 서 있던 사람이라 우리와 갈리는 지점이 있지만, 그가 남긴 기도의 기록만큼은 교단을 넘어 사랑받아 왔습니다.

브레이너드는 1718년에 태어나 스물아홉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사람입니다. 폐결핵을 앓으면서도 그는 말을 타고 눈 덮인 숲을 넘어 원주민 마을을 찾아다녔습니다. 통역을 통해서만 말씀을 전할 수 있었고, 여러 해 동안 눈에 보이는 열매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의 일기에는 같은 장면이 되풀이됩니다. 설교를 준비하기 전에 숲으로 들어가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몇 시간씩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어떤 밤에는 땅이 축축하게 젖도록 엎드려 기도하다가 옷이 다 젖은 채로 돌아왔다고 적혀 있습니다.
1745년 여름, 뉴저지의 크로스웍성이라는 마을에서 변화가 시작됩니다. 브레이너드가 평소처럼 설교하는 동안 사람들이 울기 시작했고, 그 울음이 마을 전체로 번져 수많은 원주민이 돌아왔습니다. 정작 그 자신은 그날의 설교가 특별히 잘된 것도 아니었다고 일기에 적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설교 전에 먼저 숲에서 드려진 중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 여섯 번 간구했던 그 자리가 브레이너드의 숲에서 되풀이된 셈입니다.
브레이너드가 1747년에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일기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손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그리고 존 웨슬리는 이 책을 축약하여 자기 설교자들에게 돌리면서 이렇게 권합니다. 모든 설교자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를 주의 깊게 읽으라는 당부였습니다. 윌리엄 캐리와 헨리 마틴을 비롯한 수많은 선교사가 이 한 권에 빚을 졌으니, 숲에서 홀로 드린 기도가 세대를 건너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기도
먼저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응답이 늦어질 때 사람의 방법으로 앞지르지 않고 끝까지 기다리는 믿음을 주시기를 구하며, 하늘이 조용한 계절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심을 신뢰하게 되기를 간구합니다. 아울러 남이 보는 자리보다 하나님만 보시는 자리에서 정직하기를 기도드립니다.
가정을 위해서는, 서로의 조급함을 부추기지 않고 함께 기도로 기다리는 가정이 되기를 구합니다.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는, 이름이 불리지 않는 한 사람을 끝까지 살피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한국 사회의 가장 낮은 자리에 복음이 닿기를, 그리고 열방의 소돔 같은 도시를 위해 중보하는 교회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아룁니다.
광야에서 우는 여종의 소리를 들으신 하나님, 오늘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주님은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시며,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이름을 불러 주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그 눈길이 오늘 저희에게도 머물러 있음을 생각하며 감사드립니다.
전능한 하나님 엘 샤다이시여, 저희의 능력이 끝나는 자리에서 주님의 일이 시작됨을 고백합니다. 백 세와 구십 세의 몸에서 약속을 이루신 주님께서 저희의 막다른 골목에서도 길을 내실 줄 믿습니다. 기다림에 지쳐 주저앉으려는 마음을 붙들어 주옵소서.
사람의 방법으로 하갈을 불러들였던 조급함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편법과 지름길이 눈앞에 보일 때마다 주님이 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를 주시고, 이미 저지른 선택의 열매 앞에서도 주님의 긍휼을 구하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할례를 베풀어 주옵소서. 드러나는 열심만 가꾸고 속은 비어 가는 신앙이 되지 않게 하시고, 은혜로 시작하신 구원을 거룩한 삶으로 이어 가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 안에서 온전해지는 그 길을 날마다 걷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소돔을 위해 여섯 번 아뢴 아브라함의 기도를 받으신 주님, 저희에게도 그 담대함과 겸손을 함께 주옵소서. 티끌이나 재와 같은 저희가 감히 아뢰오니, 저희 가족과 이웃과 이 민족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심판받아 마땅한 자리에서도 건지시는 주님의 손길을 바라봅니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없음을 오늘 다시 믿습니다. 내년 이맘때를 정하신 그 신실하심으로 저희의 기다림에도 끝을 주시고, 다시 오실 그날까지 믿음으로 걷게 하여 주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신 저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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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퍼런스
-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대한성서공회, 1998. 본문 출처: https://www.bskorea.or.kr
- Matthew Henry, Commentary on the Whole Bible, Vol. 1 (Genesis to Deuteronomy), 1708–1710;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판 참조. (창 16~18장 주해)
- John Wesley, Explanatory Notes upon the Old Testament, Bristol: William Pine, 1765. (창세기 16~18장 주해)
- John Wesley, A Plain Account of Christian Perfection, London, 1777. (타밈과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논의)
- Henry M. Morris, The Genesis Record: A Scientific and Devotional Commentary on the Book of Beginnings,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76.
- C. I. Scofield, ed., The Scofield Reference Bibl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09. (아브라함 언약과 여호와의 사자에 관한 주)
- John MacArthur, ed., The MacArthur Study Bible, Nashville: Word Publishing, 1997. (창 16~18장 주)
- Kenneth A. Mathews, Genesis 11:27–50:26, The New American Commentary 1B, Nashville: Broadman & Holman, 2005.
- James B. Pritchard, ed., Ancient Near Eastern Texts Relating to the Old Testament, 3rd ed.,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9. (함무라비 법전 제146조와 누지 문서의 대리 출산 관습)
- Harold Begbie, The Life of General William Booth, the Founder of the Salvation Army, 2 vols., New York: Macmillan, 1920. (1865년 런던 이스트엔드에서의 결단 기록)
- Jonathan Edwards, ed., An Account of the Life of the Late Reverend Mr. David Brainerd, Boston, 1749; John Wesley 축약판, London, 1768. (크로스웍성의 부흥과 기도 생활 기록)
- 이미지 출처(모두 위키미디어 공용에서 크기를 줄여 주소로 임베딩함): 엔 아브닷 샘 사진, Godot13, CC BY-SA 4.0 / 네게브 베두인 장막 사진, Tomergavish, CC BY-SA 4.0 / 유대 광야 구릉 사진, The Turtle Ninja, CC BY-SA 3.0 / 브엘세바 옛 우물 사진, 매트슨 컬렉션, 퍼블릭 도메인 / 네게브 들나귀 사진, Gideon Pisanty, CC BY 3.0 / 「하갈과 이스마엘」, 벤저민 웨스트,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CC0 / 사카라 할례 부조 사진, 웰컴 컬렉션, CC BY 4.0 / 팔레스타인상수리나무 사진, Davidbena, CC BY-SA 4.0 / 베두인 족장의 장막 사진, 매트슨 컬렉션, 퍼블릭 도메인 / 빵 굽는 베두인 여인 사진, 매트슨 컬렉션, 퍼블릭 도메인 / 사해 소금 지형 항공 사진, Godot13, CC BY-SA 4.0 / 헤브론 시가지 사진, Willem van de Poll, CC0 / 윌리엄 부스 사진, 퍼블릭 도메인 / 화이트채플 노숙 판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퍼블릭 도메인 / 캐서린 부스 초상, 퍼블릭 도메인 /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설교 삽화, 퍼블릭 도메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