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차 (욥기 40장 ~ 욥기 42장)
잠베지 강에 몸을 담근 하마, 짐바브웨, Bernard Gagnon 촬영, CC BY-SA 4.0
본문
욥기 40장
-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
-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겠으니 내게 대답할지니라
-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천둥 소리를 내겠느냐
- 너는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를 입을지니라
- 너의 넘치는 노를 비우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모두 낮추되
-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아지게 하며 악인을 그들의 처소에서 짓밟을지니라
- 그들을 함께 진토에 묻고 그들의 얼굴을 싸서 은밀한 곳에 둘지니라
-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
- 이제 소 같이 풀을 먹는 베헤못을 볼지어다 내가 너를 지은 것 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
- 그것의 힘은 허리에 있고 그 뚝심은 배의 힘줄에 있고
- 그것이 꼬리 치는 것은 백향목이 흔들리는 것 같고 그 넓적다리 힘줄은 서로 얽혀 있으며
- 그 뼈는 놋관 같고 그 뼈대는 쇠 막대기 같으니
-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 중에 으뜸이라 그것을 지으신 이가 자기의 칼을 가져 오기를 바라노라
- 모든 들 짐승들이 뛰노는 산은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내느니라
- 그것이 연 잎 아래에나 갈대 그늘에서나 늪 속에 엎드리니
- 연 잎 그늘이 덮으며 시내 버들이 그를 감싸는도다
- 강물이 소용돌이칠지라도 그것이 놀라지 않고 요단 강 물이 쏟아져 그 입으로 들어가도 태연하니
- 그것이 눈을 뜨고 있을 때 누가 능히 잡을 수 있겠으며 갈고리로 그것의 코를 꿸 수 있겠느냐
욥기 41장
-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
- 너는 밧줄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 갈고리로 그 아가미를 꿸 수 있겠느냐
- 그것이 어찌 네게 계속하여 간청하겠느냐 부드럽게 네게 말하겠느냐
- 어찌 그것이 너와 계약을 맺고 너는 그를 영원히 종으로 삼겠느냐
- 네가 어찌 그것을 새를 가지고 놀 듯 하겠으며 네 여종들을 위하여 그것을 매어두겠느냐
- 어찌 장사꾼들이 그것을 놓고 거래하겠으며 상인들이 그것을 나누어 가지겠느냐
- 네가 능히 많은 창으로 그 가죽을 찌르거나 작살을 그 머리에 꽂을 수 있겠느냐
- 네 손을 그것에게 얹어 보라 다시는 싸울 생각을 못하리라
- 참으로 잡으려는 그의 희망은 헛된 것이니라 그것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그는 기가 꺾이리라
- 아무도 그것을 격동시킬 만큼 담대하지 못하거든 누가 내게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느냐
-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 내가 그것의 지체와 그것의 큰 용맹과 늠름한 체구에 대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리라
- 누가 그것의 겉가죽을 벗기겠으며 그것에게 겹재갈을 물릴 수 있겠느냐
- 누가 그것의 턱을 벌릴 수 있겠느냐 그의 둥근 이틀은 심히 두렵구나
- 그의 즐비한 비늘은 그의 자랑이로다 튼튼하게 봉인하듯이 닫혀 있구나
- 그것들이 서로 달라붙어 있어 바람이 그 사이로 지나가지 못하는구나
- 서로 이어져 붙었으니 능히 나눌 수도 없구나
- 그것이 재채기를 한즉 빛을 발하고 그것의 눈은 새벽의 눈꺼풀 빛 같으며
- 그것의 입에서는 횃불이 나오고 불꽃이 튀어 나오며
- 그것의 콧구멍에서는 연기가 나오니 마치 갈대를 태울 때에 솥이 끓는 것과 같구나
- 그의 입김은 숯불을 지피며 그의 입은 불길을 뿜는구나
- 그것의 힘은 그의 목덜미에 있으니 그 앞에서는 절망만 감돌 뿐이구나
- 그것의 살껍질은 서로 밀착되어 탄탄하며 움직이지 않는구나
- 그것의 가슴은 돌처럼 튼튼하며 맷돌 아래짝 같이 튼튼하구나
- 그것이 일어나면 용사라도 두려워하며 달아나리라
- 칼이 그에게 꽂혀도 소용이 없고 창이나 투창이나 화살촉도 꽂히지 못하는구나
- 그것이 쇠를 지푸라기 같이, 놋을 썩은 나무 같이 여기니
- 화살이라도 그것을 물리치지 못하겠고 물맷돌도 그것에게는 겨 같이 되는구나
- 그것은 몽둥이도 지푸라기 같이 여기고 창이 날아오는 소리를 우습게 여기며
- 그것의 아래쪽에는 날카로운 토기 조각 같은 것이 달려 있고 그것이 지나갈 때는 진흙 바닥에 도리깨로 친 자국을 남기는구나
- 깊은 물을 솥의 물이 끓음 같게 하며 바다를 기름병 같이 다루는도다
- 그것의 뒤에서 빛나는 물줄기가 나오니 그는 깊은 바다를 백발로 만드는구나
- 세상에는 그것과 비할 것이 없으니 그것은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지음 받았구나
- 그것은 모든 높은 자를 내려다보며 모든 교만한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이니라
욥기 42장
-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 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케쉬타 하나씩과 금 고리 하나씩을 주었더라
-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니
-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본문 해설
폭풍우 속에서 이어지는 두 번째 물음
어제 우리는 폭풍우 가운데서 입을 여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음성이 멈추지 않고 이어지는 자리이며, 마침내 한 사람이 무릎을 꿇고 모든 것이 회복되는 자리입니다. 욥기 사십이 장의 긴 여정이 여기서 끝을 맺는데, 그 끝은 설명이 아니라 만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고난이 왔는지 끝까지 말씀하지 않으셨고, 대신 당신이 누구신지를 끝까지 보여 주셨습니다.
40장 1절과 2절이 첫 번째 담화의 마무리입니다.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기 트집 잡는다고 옮긴 히브리어 리브는 본래 법정에서 쓰이던 낱말로, 송사를 걸어 시비를 가린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욥은 앞선 장들에서 하나님과 법정에서 맞서고 싶다고 거듭 말해 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법정이 열리자 욥이 내놓은 대답은 단 두 줄이었습니다.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하면서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하고 아뢴 것입니다.
입을 가린다는 몸짓이 무엇을 뜻할까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완전한 항복의 표시입니다. 레위기 13장 45절에서 나병 환자가 윗입술을 가리던 모습과 같은 동작이니, 스스로를 부정하고 낮추는 자리로 내려간 것입니다.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6절에서 다시 폭풍우 가운데 말씀하시며 두 번째 담화를 시작하시는데, 7절의 명령은 38장 3절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습니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겠으니 내게 대답하라는 말씀입니다.
왜 같은 말씀을 되풀이하셨을까요? 욥의 항복이 아직 뿌리까지 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입은 다물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여전히 내가 옳다는 생각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8절이 핵심을 정확히 찌릅니다.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하시는 물음입니다. 매튜 헨리는 이 구절을 두고 사람이 자기를 의롭다 하려는 순간 반드시 하나님을 불의하다 하게 된다고 풀이했습니다.
이것은 고난 중에 있는 모든 사람이 걸려 넘어지는 지점입니다. 내가 이만큼 바르게 살았는데 왜 이런 일이 생겼느냐는 물음 속에는 하나님이 공정하지 않으시다는 혐의가 조용히 숨어 있기 마련입니다. 욥은 끝내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았지만, 자기 의를 세우려다 그 경계선 가까이까지 갔던 것입니다.
9절부터 14절은 짧지만 서늘한 제안입니다.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물으시고, 그렇다면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모두 낮추고 악인을 그들의 처소에서 짓밟아 보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인정하겠다는 말씀으로 맺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이런 뜻입니다. 세상의 악을 심판하는 일을 네가 한번 해 보라,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다면 네 힘으로 네 구원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역설적 권유인 셈입니다. 악인의 심판이 왜 늦어지느냐고 묻던 욥에게, 그 일의 무게를 직접 들어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베헤못, 하나님이 만드신 것 중의 으뜸
이제 하나님은 두 짐승을 데려오십니다. 먼저 15절의 베헤못입니다. 이제 소 같이 풀을 먹는 베헤못을 볼지어다 하시며, 내가 너를 지은 것 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 하고 덧붙이십니다.

베헤못은 히브리어 베헤마의 복수형으로, 흔히 장엄복수라고 부르는 형태입니다. 복수형을 써서 크기와 위엄을 극대화하는 표현이니, 우리말로 옮기자면 짐승 중의 짐승이라는 어감에 가깝습니다. 개역개정은 이 낱말을 번역하지 않고 소리 그대로 옮겨 두었습니다.
그렇다면 베헤못은 어떤 짐승일까요? 개역개정 각주는 하마로 볼 수도 있다고 적어 두었고, 많은 주석이 하마나 코끼리를 후보로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묘사를 하나씩 맞춰 보면 그 후보들이 좀처럼 들어맞지 않습니다.

가장 걸리는 대목이 17절입니다. 그것이 꼬리 치는 것은 백향목이 흔들리는 것 같고 하는 묘사인데, 백향목은 레바논 산지에서 자라는 거대한 침엽수로 둥치가 아름드리입니다. 하마의 꼬리는 손바닥만 하고 코끼리의 꼬리도 가느다란 채찍 같으니, 백향목에 비길 만한 꼬리를 가진 짐승은 아닙니다.
18절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 뼈는 놋관 같고 그 뼈대는 쇠 막대기 같다는 표현이며, 19절은 그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것 중에 으뜸이라고 못 박습니다. 헨리 모리스는 『욥기의 놀라운 기록』에서 이 묘사가 거대한 초식 공룡을 가리킨다고 보았고, 오늘날 창조과학 진영은 대체로 이 견해를 따릅니다.

여기서 꼭 짚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욥은 이 짐승을 직접 본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전설이나 신화를 끌어다 쓰셨다면 논증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니, 베헤못은 욥의 시대에 실제로 살아 있던 짐승이었습니다. 창조의 여섯째 날에 땅의 짐승이 지어졌고 사람도 같은 날 지어졌으니, 사람과 공룡이 같은 세상을 걸어 다녔다는 사실이 여기서 자연스럽게 확인됩니다.
21절부터 23절은 그 짐승의 거처를 보여 줍니다. 연 잎 아래와 갈대 그늘과 늪 속에 엎드리며, 요단 강 물이 쏟아져 그 입으로 들어가도 태연하다는 묘사입니다. 위 사진의 요단 계곡 같은 물가가 바로 그런 짐승이 머물 만한 자리였습니다.
리워야단, 두려움 없는 것으로 지음 받은 짐승
41장은 통째로 한 짐승에게 바쳐집니다. 리워야단입니다. 1절은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고 묻는데, 각주는 악어로 볼 수도 있다고 적었습니다.

악어설은 15절부터 17절의 비늘 묘사와 잘 어울립니다. 그의 즐비한 비늘은 그의 자랑이로다 튼튼하게 봉인하듯이 닫혀 있구나 하는 구절이며, 서로 달라붙어 바람도 지나가지 못한다는 설명이 이어집니다. 위 사진에서 보시듯 악어의 등판은 골편이 촘촘히 박힌 갑옷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18절부터 21절에서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것이 재채기를 하면 빛을 발하고, 그것의 입에서는 횃불이 나오고 불꽃이 튀어 나오며, 콧구멍에서는 연기가 나오고 입김은 숯불을 지핀다는 묘사입니다. 나일악어에게는 이런 기능이 없습니다.
혹시 이 대목이 시적 과장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시나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역사와 자연에 관하여 말할 때에도 참되다는 원칙을 따른다면, 실제로 그런 능력을 가진 생물이 있었다고 읽는 편이 본문에 더 정직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폭격수딱정벌레처럼 체내에서 화학 반응을 일으켜 섭씨 백 도에 가까운 액체를 뿜어내는 생물이 지금도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장치를 작은 벌레에게 넣어 두셨다면, 거대한 수생 생물에게 같은 원리를 주시는 일도 어려울 리가 없습니다. 고대 여러 민족의 기록에 불을 뿜는 용의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도 함께 생각해 볼 만합니다.

모든 교만한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
41장의 마지막 두 절이 이 긴 담화의 정점입니다. 세상에는 그것과 비할 것이 없으니 그것은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지음 받았구나 하시고, 그것은 모든 높은 자를 내려다보며 모든 교만한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두 절의 방향입니다. 하나님은 짐승 자랑을 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자리를 알려 주셨습니다. 피조물 하나도 당해 내지 못하는 사람이 창조주와 송사를 벌이겠다고 나섰던 모순을 비추어 주신 것입니다.
10절과 11절에 이미 그 뜻이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아무도 그것을 격동시킬 만큼 담대하지 못하거든 누가 내게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느냐 물으시고,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라고 못 박으십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1장 35절에서 이 구절을 인용했으니, 신약이 욥기의 이 선언을 그대로 이어받은 셈입니다.
더 나아가 많은 주석가가 리워야단의 묘사 뒤에서 교만의 우두머리인 사탄의 그림자를 읽어 왔습니다. 이사야 27장 1절이 리워야단을 심판의 대상으로 그리고, 요한계시록 20장이 옛 뱀의 최후를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직접 말하지 않는 바를 억지로 끌어들일 필요는 없지만, 사람이 손댈 수 없는 그 짐승조차 창조주 앞에서는 지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욥기 1장과 2장의 장면과 정확히 맞물립니다.
귀로 듣던 신앙에서 눈으로 뵙는 신앙으로
42장 1절부터 6절이 욥기 전체의 대답입니다. 욥은 먼저 2절에서 고백합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하는 말입니다.
여기 계획으로 옮긴 히브리어 메짐마는 치밀하게 세운 생각이나 작정을 뜻합니다. 욥은 세상이 우연히 굴러간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지만, 이제는 자기가 겪은 그 일조차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었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3절에서 욥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되받아 자기에게 적용합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냐는 38장 2절의 물음을 자기 입으로 되뇌며,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는 일을 말하였다고 아룁니다. 참된 회개의 모양이 바로 이것입니다.
5절이 욥기의 가장 유명한 고백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평생 경건하게 살아온 사람, 하나님이 친히 온전하고 정직하다 칭찬하신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는 점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귀로 듣는 신앙과 눈으로 뵙는 신앙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전해 들은 지식과 직접 만난 경험의 차이입니다. 머리로만 아는 신앙은 마음으로 만나는 신앙에 이르러야 비로소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의 회개
6절은 번역하기 까다롭지만 뜻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는 선언입니다. 스스로 거두어들인다고 옮긴 말은 자기가 쏟아 놓았던 주장을 도로 거두어들인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티끌과 재는 고대 근동에서 슬픔과 뉘우침을 나타내던 자리였습니다. 욥은 이미 2장 8절에서 재 가운데 앉아 있었으니, 몸이 앉아 있던 자리에 이제 마음이 내려앉은 셈입니다. 같은 재였지만 처음에는 고통의 재였고 이제는 회개의 재입니다.
여기서 꼭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욥은 자기가 당한 고난의 원인이 되는 어떤 죄를 자백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42장 7절에서 욥의 말이 옳았다고 인정하시니, 욥의 회개는 죄목의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선 피조물의 태도 전환이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이렇게 물어야 하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아는 일에서 어디쯤 서 있을까요? 들은 것만 많고 뵌 적이 없다면, 욥처럼 폭풍 한가운데서라도 그분을 만나기를 구하는 편이 낫습니다.
세 친구를 위한 번제와 중보
7절부터 9절은 반전입니다. 하나님은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참으로 뜻밖입니다. 삼십 장 넘게 정연한 신학을 펼친 세 친구는 틀렸다 하시고, 울부짖고 따지고 원망까지 쏟아 냈던 욥은 옳았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매끄러운 교리보다 정직한 씨름을 받으신 것입니다.
세 친구의 잘못은 무엇이었을까요? 고난은 반드시 죄의 결과라는 공식을 하나님께 강요한 것입니다. 그 공식은 하나님의 자유를 가두고, 결국 고통당하는 사람을 정죄하는 몽둥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8절의 처방이 아름답습니다.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번제를 드리라 하시고,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하고 약속하십니다. 자기를 가장 아프게 찌른 사람들의 제사장이 되라는 명령인 셈입니다.
내 종이라는 호칭이 네 번이나 반복된다는 점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욥기 1장 8절에서 사탄 앞에 자랑하셨던 그 호칭이 모든 일이 끝난 자리에서 다시 울립니다. 하나님은 한 번 세우신 사람을 끝까지 내 종이라 부르십니다.
갑절로 돌이키신 회복
10절은 회복의 시점을 정확히 못 박습니다.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셨다는 기록입니다. 자기 회복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남을 위한 중보의 자리에서 문이 열린 것입니다.

곤경을 돌이키셨다는 표현은 히브리어 슈브의 강한 용법으로, 포로를 되돌리신다고 말할 때 쓰이던 말과 같습니다. 욥은 고난의 포로였고, 하나님이 그를 본래 자리로 되돌려 놓으신 것입니다.
11절의 장면도 마음에 오래 남습니다.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 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위로하며 케쉬타 하나씩과 금 고리 하나씩을 주었다는 기록입니다. 케쉬타는 창세기 33장 19절에도 나오는 아주 오래된 화폐 단위이니, 이 낱말 하나가 욥기의 배경이 족장 시대임을 넌지시 알려 줍니다.

12절의 숫자를 1장 3절과 나란히 놓아 보시기 바랍니다. 양 칠천이 만 사천이 되고 낙타 삼천이 육천이 되었으며 소와 나귀도 각각 두 배가 되었으니, 문자 그대로 갑절입니다. 그런데 자녀만은 아들 일곱과 딸 셋으로 처음과 같은 수입니다.
왜 자녀는 갑절이 아니었을까요? 먼저 간 열 자녀가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짐승은 잃으면 없어지지만 자녀는 하나님 품에 있으니, 욥에게는 여전히 스무 명의 자녀가 있는 셈입니다. 이 작은 숫자 하나에 부활의 소망이 조용히 깃들어 있습니다.
여미마와 긋시아와 게렌합북
14절과 15절은 욥기에서 가장 따뜻한 마무리입니다. 세 딸의 이름이 하나하나 불리는데, 여미마는 비둘기를 뜻하는 말에서 왔다고 풀이되고, 긋시아는 향기로운 계피를 가리키며, 게렌합북은 눈가를 꾸미는 화장 가루를 담던 뿔이라는 뜻입니다.
이름의 결이 느껴지시나요? 아름다움과 향기와 빛깔의 이름들입니다. 재 가운데 앉아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던 사람의 집에 이런 이름들이 다시 생겨났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15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고,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다는 기록입니다. 아들에게만 상속하던 당시의 관행을 생각하면 대단히 파격적인 처분입니다.
16절과 17절이 조용히 막을 내립니다.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하는 문장입니다. 창세기 25장 8절의 아브라함에게 쓰인 표현과 같으니, 족장에게 돌아가는 가장 복된 마무리를 받은 것입니다.
욥기가 우리에게 남긴 결론
열이틀 동안 우리는 욥과 함께 걸어왔습니다. 이제 한 걸음 물러나 전체를 보면 욥기가 무엇을 말하는 책인지 분명해집니다. 욥기는 고난의 이유를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는 책입니다.
하늘의 회의 장면을 아는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 한 사람뿐입니다. 욥은 끝까지 사탄의 참소를 몰랐고, 하나님도 끝내 알려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설명 없이 신뢰하는 믿음이야말로 욥기가 세우려 한 자리였습니다.
욥기를 덮으며 우리가 가져가야 할 한 문장은 무엇일까요? 설명보다 그분이 먼저라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 책은 한 중보자를 향해 손을 뻗습니다. 욥은 9장 33절에서 양쪽에 손을 얹을 판결자가 없다고 탄식했고, 16장과 19장에서는 하늘의 증인과 대속자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갈망이 누구에게서 채워졌을까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채워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욥기는 세상의 끝을 바라보게 합니다. 티끌과 재에서 일으킴을 받은 욥의 회복은 다시 오실 주님이 이루실 완전한 회복의 그림자입니다. 그날에는 눈물도 사망도 애통도 없을 것이며, 지금 우리가 귀로만 듣는 그분을 눈으로 뵙게 될 것입니다.
묵상과 적용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말씀은 자기 의를 세우려다 하나님을 피고석에 세우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욥기 40장 8절의 물음은 고난 중에 있는 모든 사람의 급소를 찌릅니다. 내가 이만큼 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느냐는 항변 속에는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는 마음이 숨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기도의 자리에서 한 가지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기도가 하나님을 설득하려는 변론으로 흐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는 일입니다. 변론을 내려놓는 순간 비로소 들리는 음성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본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두 단계를 보여 줍니다. 귀로 듣는 단계와 눈으로 뵙는 단계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 분일수록 이 구별 앞에서 정직해지셔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쪽에 서 계신가요? 이 물음 앞에서 잠시 멈추어 자기 신앙의 뿌리를 더듬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자리가 곧 구원의 확신이 주어지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시는 은혜가 있고, 그 은혜 앞에 자기를 포기할 때 칭의와 중생이 임하며, 바로 그 순간부터 성화가 시작됩니다. 욥에게 폭풍 속에서 먼저 말을 거신 분도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적용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명하셨고, 그 기도의 자리에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셨습니다. 나를 가장 아프게 한 사람의 이름을 기도 노트에 적는 일이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순종입니다.
직장에서 나를 깎아내린 동료, 가정에서 마음을 할퀸 가족, 교회에서 오해로 등을 돌린 지체가 있다면 그 이름을 적어 보십시오. 그리고 그 사람이 잘되게 해 달라고 한 주간만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욥의 회복이 그 자리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네 번째로 이 본문은 창조 신앙을 다시 세워 줍니다. 베헤못과 리워야단은 신화 속 괴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시고 욥이 보았던 실제 피조물입니다. 사람과 거대한 짐승이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성경의 증언은 여섯 날 창조의 기록과 정확히 맞물립니다.
이 사실을 자녀와 함께 확인하는 일이 아주 좋은 가정 예배가 됩니다. 박물관에서 공룡 골격을 볼 때 수억 년이라는 설명 앞에서 주눅들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엿새 동안 말씀으로 지으셨고 사람과 함께 그 땅을 걷게 하셨다는 고백을 아이의 마음에 심어 주시기 바랍니다.
다섯 번째로 욥기의 결말은 고난의 끝이 반드시 온다는 소망을 줍니다. 다만 그 끝이 언제 어떤 모양으로 올지는 우리가 정할 수 없습니다. 욥도 마흔 장이 넘도록 몰랐습니다.
그러니 재정의 벼랑 끝에 서 계신 분, 진단서를 받아 든 분, 자녀 문제로 밤을 지새우는 분께 말씀드립니다. 욥기 42장은 반드시 옵니다. 지금은 41장쯤을 지나고 있을 뿐이며, 하나님의 돌이키심은 늘 때가 차면 찾아오는 법입니다.
마지막으로 자녀의 숫자가 갑절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다시 붙드시기 바랍니다. 먼저 보낸 사람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 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은 다시 오실 주님과 함께 오실 것이며, 우리는 그날 공중에서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 소망이 오늘 하루를 거룩하게 살아 낼 힘이 됩니다.
예화
장대현 교회의 밤, 길선주의 고백
1907년 1월 한겨울의 평양이었습니다. 장대현 교회에서 사경회가 열렸고, 전국에서 모여든 교인들로 예배당이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집회는 좀처럼 뜨거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1월 14일 저녁,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자 선교사들과 지도자들이 통성으로 기도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때 장대현 교회의 장로이자 이듬해 한국인 최초의 목사 일곱 명 가운데 한 사람이 되는 길선주가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그가 꺼낸 말은 설교가 아니라 자기 죄의 고백입니다.

그는 세상을 떠난 친구의 재산을 정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돈 일부를 자기 것으로 삼았다고 회중 앞에서 밝혔습니다. 그러고는 자기가 아간과 같은 자라고 하면서, 그 돈을 유족에게 돌려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당시의 기록을 남긴 선교사 윌리엄 블레어는 그 순간 예배당 전체가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적었습니다.
그날 밤 사람들은 차례로 일어나 자기 죄를 소리 내어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미움과 도둑질과 간음과 거짓이 줄줄이 터져 나왔고, 집회는 새벽 두 시가 되도록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이 평양 대부흥의 불씨가 되었고, 그 불은 곧 전국으로 번져 갔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길선주는 이미 존경받는 지도자였고 누구도 그에게 죄를 물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티끌과 재 가운데로 내려간 이유는 하나님 앞에 자기가 노출되었기 때문입니다.
욥기 42장 6절의 회개가 바로 이런 모양입니다. 사람 앞에서는 흠잡을 데 없던 사람이 하나님을 뵙는 순간 스스로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블레어는 훗날 『한국의 오순절』에서 그 집회를 회상하며, 사람의 설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사람을 깨뜨렸다고 기록했습니다.
갈라섰던 두 친구, 유언으로 맡긴 장례 설교
또 한 사람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18세기 영국 부흥의 두 기둥이었던 조지 휫필드와 존 웨슬리의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은 옥스퍼드의 홀리 클럽에서 함께 시작한 오랜 동지입니다. 휫필드가 야외 설교의 문을 열었고, 브리스톨의 광부들 앞에서 웨슬리에게 설교단을 넘겨준 사람도 휫필드였습니다. 그런데 1740년 무렵 두 사람은 심각하게 갈라섰습니다.
갈라선 이유는 예정에 관한 견해 차이입니다. 웨슬리가 1739년에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설교하며 무조건적 선택을 반박했고, 휫필드는 이듬해 긴 편지로 반박했습니다. 두 진영의 지지자들은 서로를 향해 거친 말을 쏟아 냈으며, 한동안 같은 부흥의 두 지도자가 등을 돌린 채 사역하는 안타까운 시절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두 사람은 서로를 다시 끌어안았습니다. 견해는 끝내 하나가 되지 않았지만, 상대를 향한 존중은 해마다 깊어졌습니다. 휫필드는 사람들이 자기를 웨슬리보다 높이려 할 때마다 웨슬리를 변호하는 쪽에 섰다고 전해집니다.
1770년 9월 30일, 휫필드는 미국 매사추세츠의 뉴베리포트에서 쉰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유해는 그 도시 올드 사우스 장로교회 강단 아래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남긴 유언에는 뜻밖의 조항이 하나 들어 있습니다.

자기 장례 설교를 존 웨슬리에게 맡아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삼십 년 가까이 신학으로 다투었던 그 사람에게 마지막 강단을 내준 것입니다. 웨슬리는 그해 11월 18일 런던에서 「조지 휫필드 목사의 죽음에 관하여」라는 설교를 전하며 옛 친구를 기렸습니다.
이 장면이 욥기 42장과 겹쳐지지 않나요? 하나님은 욥에게 자기를 정죄했던 세 친구의 제사장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중보의 자리에서 모든 것을 돌이켜 주셨습니다. 신학의 차이로 갈라졌던 두 부흥사가 마지막에 서로를 축복한 이 일은, 중보가 어떻게 상처를 덮는지 교회 역사가 남긴 가장 아름다운 기록 가운데 하나입니다.
기도
먼저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자기 의를 세우려다 하나님을 의심했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고, 귀로만 듣던 신앙에서 눈으로 뵙는 신앙으로 건너가게 하시기를 구합니다. 아울러 나를 아프게 한 사람의 이름을 들고 기도하는 자리까지 나아가기를 간구합니다.
가정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의 놀라움을 자녀와 함께 배우며 창조주를 고백하는 가정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는, 매끄러운 교리로 서로를 정죄하지 않고 아픈 자리에 함께 앉아 주는 공동체가 되기를 구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길선주의 고백 같은 정직한 회개가 다시 일어나기를, 열방에서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이 욥기 42장의 아침을 보게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폭풍우 가운데서 두 번이나 입을 여신 하나님, 오늘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주님은 못 하실 일이 없으시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저희의 좁은 생각으로 그 큰 뜻을 재단하려 했던 교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베헤못을 지으시고 리워야단에게 두려움 없는 성품을 넣어 주신 창조주 하나님, 주님의 솜씨를 찬양합니다. 사람이 손댈 수 없는 짐승 하나 앞에서도 작아지는 저희가, 어찌 주님과 송사를 벌일 수 있겠나이까 하는 마음으로 엎드립니다. 저희 입을 손으로 가리고 잠잠히 주님을 기다리게 하여 주옵소서.
귀로만 듣던 자리에서 눈으로 뵙는 자리로 저희를 옮겨 주옵소서. 오래 교회를 다녔으나 아직 주님을 만나지 못한 이들에게 오늘 폭풍 속의 음성을 들려주시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자기를 내려놓는 은혜를 부어 주시기 바랍니다.
친구들을 위해 기도할 때 곤경을 돌이키신 주님, 저희에게도 그 중보의 마음을 주옵소서. 저희를 오해하고 상처 준 이들의 이름을 원망이 아니라 기도로 부르게 하시고, 그 기도 가운데 저희 자신이 먼저 자유로워지게 하여 주옵소서. 용서가 어려운 자리에서는 용서할 마음까지도 주님이 지어 주실 줄 믿습니다.
갑절로 돌이키시는 아버지, 지금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주의 백성을 기억하여 주옵소서. 그들의 눈물을 병에 담으시고 때가 차면 여미마와 긋시아와 게렌합북의 아침을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보낸 사랑하는 이들을 다시 만날 그날의 소망으로 오늘을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
은혜로 시작하신 구원을 거룩으로 완성하여 가시는 주님, 저희를 사랑 안에서 온전하게 하여 주옵소서. 다시 오실 그날까지 설명 없이도 신뢰하는 믿음으로 걷게 하시고, 저희의 모든 호흡으로 주님을 찬양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저희의 영원한 대속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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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퍼런스
-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대한성서공회, 1998. 본문 출처: https://www.bskorea.or.kr
- Matthew Henry, Commentary on the Whole Bible, Vol. 3 (Job to Song of Solomon), 1708–1710;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판 참조. (욥 40~42장 주해)
- John Wesley, Explanatory Notes upon the Old Testament, Bristol: William Pine, 1765. (욥기 40~42장 주해)
- John Wesley, “On the Death of the Rev. Mr. George Whitefield” (Sermon 53), 1770년 11월 18일 런던에서 전한 설교; The Works of John Wesley, Vol. 2 수록.
- John E. Hartley, The Book of Job,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88. (여호와의 두 번째 담화와 욥의 회개 주해)
- Robert L. Alden, Jo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11, Nashville: Broadman & Holman, 1993.
- Henry M. Morris, The Remarkable Record of Job,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8. (베헤못과 리워야단에 관한 논의)
- John MacArthur, ed., The MacArthur Study Bible, Nashville: Word Publishing, 1997. (욥 40~42장 주)
- C. I. Scofield, ed., The Scofield Reference Bibl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09. (욥기 주)
- William Newton Blair and Bruce F. Hunt, The Korean Pentecost and the Sufferings Which Followed, Edinburgh: Banner of Truth Trust, 1977.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 사경회와 길선주의 공개 고백 기록)
- Arnold A. Dallimore, George Whitefield: The Life and Times of the Great Evangelist of the Eighteenth-Century Revival, 2 vols., Edinburgh: Banner of Truth Trust, 1970·1980. (휫필드와 웨슬리의 논쟁, 화해, 유언에 관한 기록)
- 이미지 출처(모두 위키미디어 공용에서 크기를 줄여 주소로 임베딩함): 잠베지 강의 하마 사진, Bernard Gagnon, CC BY-SA 4.0 / 베를린 자연사박물관 용각류 골격 사진, Dosseman, CC BY-SA 4.0 / 이집트 파이앙스 하마상 사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CC0 / 나일악어 사진, Charles J. Sharp, CC BY-SA 4.0 / 나일악어 머리 사진, Leigh Bedford, CC BY 2.0 / 요단 강 계곡 사진, Staselnik, CC BY-SA 3.0 / 「베헤못과 리워야단」, 윌리엄 블레이크, 미국 국립미술관, CC0 / 유대 광야 구릉 사진, David Shankbone, CC BY-SA 3.0 / 아둘람 부근 양 떼 사진, Davidbena, CC BY-SA 4.0 / 네게브 낙타 사진, brewbooks, CC BY-SA 2.0 / 평양 장대현 교회 사진, 퍼블릭 도메인 / 길선주 목사 사진, 퍼블릭 도메인 / 조지 휫필드 초상, 존 러셀, 퍼블릭 도메인 / 휫필드 야외 설교 삽화, 퍼블릭 도메인 / 뉴베리포트 올드 사우스 교회 사진, 퍼블릭 도메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