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차 (욥기 32장 ~ 욥기 34장)
사우디아라비아 북서부 타이마의 구시가 전경, 리처드 모텔 촬영, CC BY 2.0
본문
욥기 32장
- 욥이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이 말을 그치니
-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니 그가 욥에게 화를 냄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 또 세 친구에게 화를 냄은 그들이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욥을 정죄함이라
- 엘리후는 그들의 나이가 자기보다 여러 해 위이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화를 내니라
-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뒷전에서 나의 의견을 감히 내놓지 못하였노라
- 내가 말하기를 나이가 많은 자가 말할 것이요 연륜이 많은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노라
-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
-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나도 내 의견을 말하리라
- 보라 나는 당신들의 말을 기다렸노라 당신들의 슬기와 당신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노라
- 내가 자세히 들은즉 당신들 가운데 욥을 꺾어 그의 말에 대답하는 자가 없도다
- 당신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진상을 파악했으나 그를 추궁할 자는 하나님이시요 사람이 아니라 하지 말지니라
- 그가 내게 자기 이론을 제기하지 아니하였으니 나도 당신들의 이론으로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리라
- 그들이 놀라서 다시 대답하지 못하니 할 말이 없음이었더라
- 당신들이 말 없이 가만히 서서 다시 대답하지 아니한즉 내가 어찌 더 기다리랴
- 나는 내 본분대로 대답하고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
- 내 속에는 말이 가득하니 내 영이 나를 압박함이니라
- 보라 내 배는 봉한 포도주통 같고 터지게 된 새 가죽 부대 같구나
- 내가 말을 하여야 시원할 것이라 내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
- 나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리니
- 이는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함이라 만일 그리하면 나를 지으신 이가 속히 나를 데려가시리로다
욥기 33장
- 그런즉 욥이여 내 말을 들으며 내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하노라
- 내가 입을 여니 내 혀가 입에서 말하는구나
- 내 마음의 정직함이 곧 내 말이며 내 입술이 아는 바가 진실을 말하느니라
-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 그대가 할 수 있거든 일어서서 내게 대답하고 내 앞에 진술하라
- 나와 그대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 내 위엄으로는 그대를 두렵게 하지 못하고 내 손으로는 그대를 누르지 못하느니라
- 그대는 실로 내가 듣는 데서 말하였고 나는 그대의 말소리를 들었느니라
- 이르기를 나는 깨끗하여 악인이 아니며 순전하고 불의도 없거늘
- 참으로 하나님이 나에게서 잘못을 찾으시며 나를 자기의 원수로 여기사
-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 하였느니라
- 내가 그대에게 대답하리라 이 말에 그대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
- 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하여 어찌 하나님과 논쟁하겠느냐
-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은 관심이 없도다
-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에 환상을 볼 때에
- 그가 사람의 귀를 여시고 경고로써 두렵게 하시니
- 이는 사람에게 그의 행실을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의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
- 그는 사람의 혼을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 생명을 칼에 맞아 멸망하지 않게 하시느니라
- 혹은 사람이 병상의 고통과 뼈가 늘 쑤심의 징계를 받나니
- 그의 생명은 음식을 싫어하고 그의 마음은 별미를 싫어하며
- 그의 살은 파리하여 보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던 뼈가 드러나서
- 그의 마음은 구덩이에, 그의 생명은 멸하는 자에게 가까워지느니라
- 만일 일천 천사 가운데 하나가 그 사람의 중보자로 함께 있어서 그의 정당함을 보일진대
-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사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
- 그런즉 그의 살이 청년보다 부드러워지며 젊음을 회복하리라
-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사 그로 말미암아 기뻐 외치며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하시고 사람에게 그의 공의를 회복시키시느니라
- 그가 사람 앞에서 노래하여 이르기를 내가 범죄하여 옳은 것을 그르쳤으나 내게 무익하였구나
- 하나님이 내 영혼을 건지사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셨으니 내 생명이 빛을 보겠구나 하리라
- 실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 모든 일을 재삼 행하심은
- 그들의 영혼을 구덩이에서 이끌어 생명의 빛을 그들에게 비추려 하심이니라
- 욥이여 내 말을 귀담아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말하리라
- 만일 할 말이 있거든 대답하라 내가 기쁜 마음으로 그대를 의롭다 하리니 그대는 말하라
- 만일 없으면 내 말을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지혜로 그대를 가르치리라
욥기 34장
- 엘리후가 말하여 이르되
- 지혜 있는 자들아 내 말을 들으며 지식 있는 자들아 내게 귀를 기울이라
- 입이 음식물의 맛을 분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별하나니
- 우리가 정의를 가려내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보자
- 욥이 말하기를 내가 의로우나 하나님이 내 의를 부인하셨고
- 내가 정당함에도 거짓말쟁이라 하였고 나는 허물이 없으나 화살로 상처를 입었노라 하니
- 어떤 사람이 욥과 같으랴 욥이 비방하기를 물마시듯 하며
-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한패가 되어 악인과 함께 다니면서
- 이르기를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나 무익하다 하는구나
- 그러므로 너희 총명한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결코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 사람의 행위를 따라 갚으사 각각 그의 행위대로 받게 하시나니
-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
- 누가 땅을 그에게 맡겼느냐 누가 온 세상을 그에게 맡겼느냐
- 그가 만일 뜻을 정하시고 그의 영과 목숨을 거두실진대
- 모든 육체가 다 함께 죽으며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리라
- 만일 네가 총명이 있거든 이것을 들으며 내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 정의를 미워하시는 이시라면 어찌 그대를 다스리시겠느냐 의롭고 전능하신 이를 그대가 정죄하겠느냐
- 그는 왕에게라도 무용지물이라 하시며 지도자들에게라도 악하다 하시며
- 고관을 외모로 대하지 아니하시며 가난한 자들 앞에서 부자의 낯을 세워주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라
- 그들은 한밤중에 순식간에 죽나니 백성은 떨며 사라지고 세력 있는 자도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제거함을 당하느니라
- 그는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 행악자는 숨을 만한 흑암이나 사망의 그늘이 없느니라
-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시기에 오래 생각하실 것이 없으시니
- 세력 있는 자를 조사할 것 없이 꺾으시고 다른 사람을 세워 그를 대신하게 하시느니라
- 그러므로 그는 그들의 행위를 아시고 그들을 밤 사이에 뒤집어엎어 흩으시는도다
- 그들을 악한 자로 여겨 사람의 눈 앞에서 치심은
- 그들이 그를 떠나고 그의 모든 길을 깨달아 알지 못함이라
- 그들이 이와 같이 하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상달하게 하며 빈궁한 사람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들리게 하느니라
- 주께서 침묵하신다고 누가 그를 정죄하며 그가 얼굴을 가리신다면 누가 그를 뵈올 수 있으랴 그는 민족에게나 인류에게나 동일하시니
- 이는 경건하지 못한 자가 권세를 잡아 백성을 옭아매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 그대가 하나님께 아뢰기를 내가 죄를 지었사오니 다시는 범죄하지 아니하겠나이다
- 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악을 행하였으나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 하였는가
- 하나님께서 그대가 거절한다고 하여 그대의 뜻대로 속전을 치르시겠느냐 그러면 그대가 스스로 택할 것이요 내가 할 것이 아니니 그대는 아는 대로 말하라
- 슬기로운 자와 내 말을 듣는 지혜 있는 사람은 반드시 내게 말하기를
- 욥이 무식하게 말하니 그의 말이 지혜롭지 못하도다 하리라
- 나는 욥이 끝까지 시험 받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 대답이 악인과 같음이라
- 그가 그의 죄에 반역을 더하며 우리와 어울려 손뼉을 치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본문 해설
네 번째 목소리의 등장
“욥의 말이 그치니라"로 닫혔던 어제의 본문 뒤에,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입을 엽니다. 욥기 32장부터 37장까지 여섯 장을 혼자 채우게 될 네 번째 변론자, 부스 사람 엘리후입니다. 그는 긴 토론 내내 이름도 없이 자리를 지키던 젊은 청중이었는데, 세 친구가 말문을 닫고 욥이 결백을 맹세한 그 무거운 침묵 속에서 더는 참지 못하고 일어섰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지막 인간 변론자의 첫 세 장을 함께 읽습니다.
엘리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성경 자신이 하나의 단서를 줍니다. 욥기 42장 7절에서 하나님은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그 두 친구에게 진노를 밝히시지만, 엘리후의 이름은 거기 나오지 않습니다.
세 친구가 받은 책망의 목록에서 엘리후가 빠진 사실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매튜 헨리도 엘리후의 말을 세 친구의 논리와 구별하여 다루며, 그가 욥을 정죄하기보다 하나님의 공의를 변호하려 했던 사람이라고 풀이합니다. 물론 엘리후에게도 지나친 대목이 분명히 있으니, 그 점은 뒤에서 따로 짚어 보겠습니다.
구조는 이렇게 잡아 두시면 좋겠습니다. 32장은 왜 내가 말하려 하는가에 대한 긴 서론이고, 33장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방식이며, 34장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변호입니다.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32장 2절이 이 사람의 신분을 꼼꼼히 밝힙니다. 그는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입니다. 욥기에서 아버지의 이름과 종족까지 함께 기록된 사람은 엘리후뿐이니, 저자가 그를 특별히 자리매김하고 있는 셈입니다.
부스라는 이름은 창세기 22장 21절에 처음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들로 우스와 부스가 나란히 등장하는데, 욥이 살던 땅의 이름이 바로 우스였습니다. 두 형제의 이름이 두 지명으로 남았다는 뜻이니, 엘리후는 욥과 같은 문화권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예레미야 25장 23절은 그 위치를 더 좁혀 줍니다. 거기서 드단과 데마와 부스가 한 묶음으로 불리는데, 드단과 데마는 아라비아 북서부의 오아시스 도시들입니다. 데마는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의 타이마로, 위 사진처럼 고대 암각화와 성벽이 남아 있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엘리후는 어디서 온 사람일까요? 아라비아 북서부 사막의 대상로 지역에서 왔다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대상들이 오가며 소식과 지혜를 나르던 그 길목에서 자란 젊은이가 지금 욥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름의 뜻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엘리후는 히브리어로 그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이고, 아버지 바라겔은 하나님이 복 주신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이름에 담은 집안에서 자란 사람이 하나님을 변호하러 나선 장면입니다.

이 지리 정보가 왜 중요할까요? 욥기의 사건이 이스라엘이 민족으로 서기 이전의 족장 시대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해 주기 때문입니다. 헨리 모리스는 『욥기의 놀라운 기록』에서 욥기 전체에 모세 율법과 성막, 제사장 제도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욥기를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 가운데 하나로 봅니다.
나이와 지혜에 대한 재검토
32장 4절부터 7절에서 엘리후는 자기가 왜 그동안 잠잠했는지 설명합니다. 어른들의 나이가 자기보다 여러 해 위이므로 뒷전에서 의견을 감히 내놓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연장자의 발언권은 거의 절대적이었으니, 그의 침묵은 예의였습니다.
그런데 8절에서 그의 생각이 한 번 뒤집힙니다.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신다는 고백입니다. 지혜의 출처가 연륜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선언이니, 참으로 담대한 전환입니다.
여기 쓰인 히브리어 표현이 깊습니다. 전능자의 숨결은 니쉬마트 샤다이로, 창세기 2장 7절에서 하나님이 사람의 코에 불어넣으신 생명의 숨결과 같은 계열의 낱말입니다. 사람을 사람 되게 한 그 숨이 지금도 깨달음의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9절은 그 결론을 아주 짧게 못 박습니다.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머리가 하얘지는 일과 하나님을 아는 일은 자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혹시 이 대목이 어른을 무시하는 말처럼 들리시나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6절과 7절에서 연장자를 존중했던 자기 태도를 먼저 길게 밝힌 뒤에 이 말을 꺼냈습니다. 존중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존중 위에 하나님을 더 높이 둔 것입니다.
터지게 된 새 가죽 부대
32장 18절부터 20절에는 아주 생생한 비유가 담겨 있습니다. 그는 자기 속에 말이 가득하여 영이 자기를 압박하며, 자기 배가 봉한 포도주통 같고 터지게 된 새 가죽 부대 같다고 말합니다.

이 비유를 이해하려면 고대의 가죽 부대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염소나 양의 가죽을 통째로 꿰매어 만든 자루에 갓 짠 포도즙을 담으면, 발효가 시작되며 가스가 차올라 부대가 팽팽하게 부풀어 오릅니다. 봉한 입구를 열지 않으면 결국 터지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같은 사물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으면 부대가 터진다는 마태복음 9장 17절의 비유입니다. 위 사진의 부대들이 바로 그 전통을 잇는 물건입니다.
엘리후의 심정이 이제 선명해지지 않나요? 그는 말하고 싶어 안달하는 수다쟁이가 아니라, 안에서 차오르는 압력을 더 견딜 수 없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20절에서 말을 하여야 시원하겠다고 한 고백은 그래서 솔직합니다.
사람의 낯을 보지 않겠다는 선언
32장 21절과 22절은 엘리후가 스스로 묶은 서약입니다. 그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않으며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아첨하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왜 그렇게까지 말했을까요? 그 이유를 22절이 밝힙니다.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만일 그리한다면 나를 지으신 이가 속히 나를 데려가시리라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 두려움은 건강한 두려움입니다. 사람의 눈치를 보는 말과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는 말은 결국 서로 다른 열매를 맺기 마련입니다. 엘리후는 그 갈림길을 알고 있었습니다.
세 친구의 말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욥을 위로하러 왔다가 자기 신학을 지키는 일에 매달렸고, 결국 보이지 않는 죄를 자백하라고 다그치는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엘리후는 적어도 그 함정은 보고 있었던 셈입니다.
흙으로 지으심을 입은 두 사람
33장 1절부터 7절에서 엘리후는 욥에게 직접 말을 겁니다. 그리고 세 친구가 끝까지 하지 못한 한마디를 꺼냅니다. 나와 그대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6절의 히브리어 표현은 흙에서 꼬집어 떼어낸 한 덩이라는 그림을 담고 있습니다. 토기장이가 큰 흙 반죽에서 한 움큼을 떼어 그릇을 빚는 장면입니다. 위 사진의 물레 앞에 앉은 손을 보시면 그 그림이 금방 떠오를 것입니다.
창세기 2장 7절이 자연스럽게 겹쳐집니다.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아담은 신화 속 상징이 아니라 실제로 흙에서 지어진 첫 사람이었고, 엘리후도 자기를 그 아담의 후손으로 이해했습니다.
7절이 이 겸손의 실제 효과를 보여 줍니다. 내 위엄으로는 그대를 두렵게 하지 못하고 내 손으로는 그대를 누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나와 너가 같은 흙이라는 자각은 사람을 누르는 손을 내려놓게 합니다.
가정과 일터에서도 이 원리는 그대로 작동하는 법입니다. 상대를 누르려는 마음은 거의 언제나 내가 저 사람과 다른 재료로 만들어졌다는 착각에서 자라납니다. 흙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말의 온도를 낮출 줄 압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귀를 여시는 방식
33장 12절부터 14절이 엘리후의 핵심 반박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대답하지 않으신다고 호소했지만, 엘리후는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은 관심이 없다고 지적합니다.
침묵의 문제가 하나님께 있지 않고 사람의 주의력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말씀하실까요? 15절부터 18절이 첫 번째 방식을 알려 줍니다.
첫째는 밤의 꿈과 환상입니다. 사람이 침상에서 깊이 잠들 때에 하나님이 사람의 귀를 여시고 경고로써 두렵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낮의 소음이 멎은 자리에서 사람이 비로소 듣게 되는 음성이 있습니다.
그 목적이 17절에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사람에게 그의 행실을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의 교만을 막으려 하심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경고는 사람을 부수려는 것이 아니라 구덩이로 가는 발걸음을 돌리게 하려는 손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는 꼭 조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꿈을 새로운 계시의 통로로 삼지 않습니다. 성경이 완성된 이 시대에 하나님의 뜻은 기록된 말씀을 통해 분명히 주어지며, 어떤 체험도 성경 위에 올라설 수 없습니다.
병상의 고통과 구덩이의 문턱
33장 19절부터 22절이 두 번째 방식입니다. 사람이 병상의 고통과 뼈가 늘 쑤심의 징계를 받으며, 음식을 싫어하고 살이 파리해져 보이지 않던 뼈가 드러난다는 묘사입니다.
이 묘사가 누구의 몸을 그린 것인지 묻고 싶을 만큼 욥의 상태와 똑같습니다. 그러나 엘리후의 의도는 욥을 조롱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고통조차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방식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보이고 있었습니다.
11절에서 욥이 썼던 표현도 짚어 두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내 발을 차꼬에 채우셨다는 항변입니다. 차꼬는 위 사진처럼 발목을 끼워 몸을 묶어 두는 형틀이니, 욥은 자기 처지를 죄수의 처지로 느꼈던 것입니다.
22절이 그 끝을 말합니다. 그의 마음은 구덩이에, 그의 생명은 멸하는 자에게 가까워진다는 문장입니다. 구덩이로 번역된 샤핫은 무덤과 죽음의 세계를 가리키는 낱말로, 욥기에서 거듭 등장합니다.
사람이 이 문턱까지 밀려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엘리후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잃고 싶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18절과 30절이 같은 목적을 두 번 반복하며 혼을 구덩이에서 이끌어 생명의 빛을 비추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일천 중에 하나인 중보자
33장 23절과 24절은 구약 전체에서 가장 놀라운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만일 일천 천사 가운데 하나가 그 사람의 중보자로 함께 있어서 그의 정당함을 보이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사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신다는 선언이 여기 담겨 있습니다.

여기 중보자로 옮겨진 히브리어는 멜리츠입니다. 통역자, 대변인, 중간에서 말을 전하는 자를 가리키는 낱말로, 구약에 세 번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아람어 탈굼은 이 낱말을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로 옮겼는데, 요한복음에서 성령을 가리키며 쓰인 바로 그 말입니다.
고대 근동에도 고난의 의미를 묻는 글들이 있었습니다. 위 사진의 점토판은 니네베에서 나온 루들룰 벨 네메키라는 바빌로니아 문헌으로, 억울하게 고통받는 사람의 독백을 담고 있습니다. 다만 욥기가 그런 글을 베꼈다고 보는 견해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욥기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실제 역사이며, 주변 문헌과의 표면적 유사성은 사람이 어디서나 같은 질문을 품었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대속물: 구덩이에서 건지는 값
24절 후반이 그 중보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합니다.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여기 쓰인 코페르는 사람의 목숨을 대신하여 지불되는 값, 곧 몸값을 뜻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멈추어 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욥은 9장 33절에서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가 없다고 탄식했고, 16장 19절에서는 하늘에 자기 증인이 계시다고 붙들었으며, 19장 25절에서는 자기 대속자가 살아 계심을 고백했습니다. 그 갈망이 33장에서 다시 한 번 또렷하게 울립니다.
그 중보자는 누구일까요? 윌리엄 배릭은 2003년 복음주의신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에서 이 문제를 길게 다룬 뒤, 엘리후가 묘사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분은 오직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뿐이라고 결론 짓습니다. 사람도 천사도 다른 사람의 영혼을 죽음에서 건져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편 49편 7절부터 9절이 그 근거를 못 박습니다. 아무도 자기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손에는 그 값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디모데전서 2장 5절과 6절이 욥기 33장의 참된 성취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시며,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다는 복음입니다. 욥은 그 이름을 몰랐지만, 그 이름이 아니면 메워질 수 없는 간격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25절부터 28절이 그 결과를 노래로 그립니다. 살이 청년보다 부드러워지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며, 사람 앞에서 내 생명이 빛을 보겠구나 하고 노래한다는 장면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한 사람 안에서 일으키는 변화의 그림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변호
34장에서 엘리후는 청중을 넓혀 좌중 전체에게 말합니다. 2절에서 지혜 있는 자들과 지식 있는 자들을 부르고, 3절에서 입이 음식물의 맛을 분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별한다는 잠언 같은 문장을 던집니다.

10절과 12절이 이 장의 심장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결코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신다는 두 번의 선언입니다. 엘리후가 끝까지 지키려 한 울타리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13절의 반문이 날카롭습니다. 누가 땅을 그에게 맡겼으며 누가 온 세상을 그에게 맡겼느냐는 물음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위임받은 관리인이 아니라 스스로 주인이신 창조주이시므로, 상급 기관에 보고할 의무가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14절과 15절이 그 주권의 무게를 보여 줍니다. 그가 뜻을 정하시고 영과 목숨을 거두신다면 모든 육체가 다 함께 죽고 사람은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씀입니다. 전도서 12장 7절이 같은 진리를 이어받습니다.
외모로 사람을 대하지 않으시는 심판자
34장 18절부터 20절은 하나님의 재판정을 보여 줍니다. 그는 왕에게라도 무용지물이라 하시며, 고관을 외모로 대하지 아니하시며 가난한 자들 앞에서 부자의 낯을 세워 주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가 19절 끝에 붙어 있습니다.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되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앞에서 신분은 서류 한 장도 되지 못합니다. 위 파피루스 그림처럼 사람의 저울은 기울 수 있어도 하나님의 저울은 기울지 않습니다.
21절과 22절이 그 심판의 정확성을 말합니다. 그는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니, 행악자에게는 숨을 만한 흑암이나 사망의 그늘이 없다는 선언입니다.
28절은 특별히 따뜻합니다.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상달하고 빈궁한 사람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들린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차가운 법조문이 아니라 약한 자의 울음소리에 반응하는 공의입니다.
엘리후의 지나침과 그 한계
여기까지 읽으면 엘리후가 참 바르게 말했다고 느껴집니다. 그런데 34장 끝부분에서 그의 혀가 미끄러집니다. 35절에서 욥이 무식하게 말한다고 단정하고, 36절에서 욥이 끝까지 시험 받기를 원한다고 말하며, 37절에서 그가 죄에 반역을 더했다고 몰아붙입니다.
7절과 8절은 더 가혹합니다. 욥이 비방하기를 물마시듯 하며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한패가 되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욥기 1장 8절에서 하나님이 친히 욥을 온전하고 정직한 자라 부르셨으니, 엘리후의 이 평가는 분명히 지나쳤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엘리후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그의 하나님에 관한 말은 대체로 옳았고, 욥에 관한 말은 자주 틀렸다고 정리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하나님께서 42장에서 세 친구만 책망하신 것도 이 구분과 어울립니다.
여기에 우리를 향한 거울이 있습니다. 교리가 정확한 사람이 사람을 다루는 일에서 넘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바르게 말하는 입술과 상처 입은 이웃을 바르게 대하는 손은 함께 자라야 합니다.
엘리후의 변론이 끝나려면 아직 세 장이 남았습니다. 그는 이제 하늘과 구름과 번개를 가리키며 하나님의 위엄을 노래할 것이고, 그 노래가 끝나는 순간 폭풍우 가운데서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그 거대한 전환을 준비하는 발판입니다.
묵상과 적용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장 먼저 주는 말씀은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대답하지 않으신다고 아팠고, 우리도 자주 그 자리에 앉습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이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이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짚었습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의 질문이 조금 바뀌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듣는 자리에 앉지 않은 것인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꿈과 환상을 좇자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통로는 성경이 펼쳐진 책상과 무릎을 꿇는 자리입니다.
구체적으로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루에 단 십 분이라도 소리를 끊고 성경을 펼치는 시간을 정해 보십시오. 손안의 작은 창을 덮지 않으면 그 십 분은 결코 생기지 않습니다. 듣기로 작정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늘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두 번째로 본문은 고난이 하나님의 언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엘리후는 병상의 고통도 사람의 귀를 여는 하나님의 방식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고난이 죄의 징벌이라는 세 친구의 공식은 틀렸지만, 모든 고난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체념 역시 성경의 길이 아닙니다.
칭의의 순간에 시작된 성화는 평생 이어지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신 그 자리에서 손을 떼지 않으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다듬어 가시는 일을 계속하십니다. 아픔이 그 다듬는 손길의 도구로 쓰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속에 있는 분은 두 가지 질문을 함께 품으시면 좋겠습니다. 첫째는 숨은 죄를 찾아내려는 수색이 아니라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이 내게 가르치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둘째는 이 고통을 지나며 내 이웃을 향한 마음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세 번째 말씀은 중보자와 대속물에 관한 것입니다. 욥기 33장 24절의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는 선언은 사람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서 값이 나왔음을 보여 줍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로 시작됩니다.
이것이 구원의 출발점입니다. 우리가 찾기 전에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이 칭의와 중생으로 우리를 새로 낳으시고, 그 순간부터 성화의 길이 열립니다. 내 결백을 쌓아 올려 하나님 앞에 제출하는 길은 욥에게도 우리에게도 끝내 막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실패했을 때가 아니라, 내 신앙 경력이 하나님을 만족시킨다고 느끼는 순간입니다. 그때 우리는 중보자 없이 하나님 앞에 서려 하는 셈입니다. 매일 그리스도의 피로 다시 서는 사람이 끝까지 서 있게 되는 법입니다.
네 번째로 34장은 직장과 사회에서의 공정을 다시 묻습니다. 하나님은 고관을 외모로 대하지 않으시고 부자의 낯을 세워 주지 않으십니다. 그분을 닮는다는 말은 사람을 형편에 따라 다르게 대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포함합니다.
일터에서는 이렇게 적용해 보실 수 있습니다. 결정권이 없는 신입과 결정권을 가진 상사에게 쓰는 말의 온도를 같게 맞추어 보십시오. 가정에서는 집안에서 가장 목소리가 작은 식구의 의견을 먼저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교회 공동체에서는 헌금 액수나 직업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지 않도록 서로 지켜 주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엘리후에게서 배우는 경고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관해 바르게 말하면서도 상처 입은 사람을 향해서는 날카로웠습니다. 정확한 교리와 따뜻한 손이 함께 자라지 않으면 우리의 옳은 말이 이웃을 베는 칼이 되고 맙니다.
오늘 하루 누군가에게 바른 말을 해야 할 자리가 생긴다면, 그 말을 꺼내기 전에 엘리후의 한 문장을 먼저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도 그대와 같이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다는 고백입니다. 그 자리에서 나온 말만이 사람을 세웁니다. 다시 오실 주님께서 우리의 말과 손을 함께 살피실 그날을 바라보며, 오늘의 말 한마디를 고르게 되기를 원합니다.
예화
열다섯 살 소년의 눈이 열린 날
1850년 1월 6일 아침, 영국 에식스주 콜체스터에는 눈보라가 몰아쳤습니다. 열다섯 살 소년 찰스 해던 스펄전은 그날 다른 교회로 가려고 집을 나섰지만, 눈 때문에 더 걸을 수 없어 아틸러리 스트리트의 작은 원시감리교회로 발길을 돌립니다. 그 교회에 모인 사람은 열다섯 명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날 설교자는 오지 못했습니다. 눈길에 발이 묶였던 것입니다. 할 수 없이 구두 수선공으로 알려진 평신도 한 사람이 강단에 올라 이사야 45장 22절을 펼쳤습니다. 땅의 모든 끝이여 나를 바라보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스펄전은 자서전에서 그 사람의 설교 솜씨를 솔직히 기록했습니다. 그는 본문의 낱말조차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고, 십 분 만에 할 말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그가 갑자기 눈을 들어 뒤쪽 통로에 앉아 있던 소년을 똑바로 가리켰습니다.
“젊은이, 자네는 참 비참해 보이는구먼.” 그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네가 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영원히 비참할 걸세. 예수를 바라보게! 바라보게! 바라보게!” 스펄전은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그 한마디에 구름이 걷혔고 자기는 구원의 길을 보았다는 고백입니다.
이 이야기를 오늘 본문과 나란히 놓아 보시기 바랍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이 사람의 귀를 여시는 분이라고 말했고, 그 통로가 사람의 자격과는 무관하다고 보았습니다. 눈 때문에 멈춘 걸음, 오지 못한 설교자, 말이 서툰 구두 수선공은 사람의 눈으로 보면 모두 실패한 조건입니다.
그런데 그 조건들 속에서 한 소년의 귀가 열렸습니다. 그 소년은 훗날 런던 메트로폴리탄 태버내클에서 수십 년간 수천 명에게 복음을 전하고, 고아원과 목회자 양성 학교를 세운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한 번의 서툰 설교가 한 세대의 강단을 바꾼 셈입니다.
여기서 반드시 붙들어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스펄전이 들은 말씀의 핵심은 네가 무엇을 하라가 아니라 나를 바라보라였습니다. 욥기 33장 24절의 대속물처럼, 값은 사람이 치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마련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올더스게이트의 저녁, 데워진 마음
또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1738년 5월 24일 수요일 저녁의 일입니다. 서른네 살의 성공회 사제 존 웨슬리는 그날 저녁 런던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작은 모임에 마음 없이 참석했습니다.

그때까지 그의 삶은 누가 보아도 흠잡을 데 없는 종교적 열심의 삶입니다. 옥스퍼드에서 홀리 클럽을 이끌며 규칙적으로 금식하고 감옥을 찾아가 섬겼고, 조지아 식민지에 선교사로 건너가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항해 중 폭풍을 만났을 때 자기 안에 죽음을 이기는 평안이 없음을 깨닫고 돌아옵니다.
올더스게이트의 그 저녁,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마음에 일으키시는 변화를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웨슬리는 그날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저녁 여덟 시 사십오 분경에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는 기록입니다.
그가 적은 다음 문장이 더 중요합니다. 자기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게 되었고, 그리스도께서 자기 죄를 제거하시고 자기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주어졌다는 고백입니다. 종교적 노력의 긴 목록이 아니라 한 분을 향한 신뢰가 그를 바꾸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웨슬리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그는 오십 년 넘게 말을 타고 영국 전역을 돌며 사만 번이 넘는 설교를 했고, 감리교 운동을 통해 광부와 직공과 가난한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다만 그는 그 모든 수고를 구원의 값으로 내놓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런던 박물관 앞에는 위 사진의 조형물이 서 있습니다. 올더스게이트 플레임이라 불리는 청동 불꽃에는 웨슬리가 일기에 적은 그 문장이 새겨져 있습니다. 한 사람의 마음이 데워진 저녁을 도시가 돌에 새겨 기억하는 것입니다.
두 이야기가 한 방향을 가리키지 않나요? 스펄전은 눈보라 속 작은 예배당에서, 웨슬리는 남이 읽어 주는 책 한 대목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욥기 33장이 말한 대로,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는 분이시며 사람의 귀를 여시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기도
먼저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신다고 원망하기 전에 내가 듣는 자리에 앉았는지 돌아보기를 구하며, 말씀 앞에 머무는 시간을 하루 중에 반드시 확보하기를 간구합니다. 아울러 내 결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을 유일한 근거로 삼는 믿음을 지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가정을 위해서는, 서로를 누르려는 손을 내려놓고 같은 흙으로 지어진 사이임을 기억하는 가정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는, 바른 교리와 따뜻한 손이 함께 자라 상처 입은 성도가 안심하고 머물 수 있는 공동체가 되기를 구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힘없는 이들의 부르짖음이 묻히지 않고, 열방에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처음 들려지는 땅마다 귀가 열리기를 기도합니다.
말씀하시기를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 앞에 나아왔습니다. 주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끝까지 기다려 주시는 분이시며, 사람의 귀를 여시려고 밤에도 낮에도 찾아오시는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그 인내 앞에 저희 마음을 엽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저희 귀가 둔하였음을 자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리가 가득한 하루를 보내면서 정작 주님의 말씀은 지나쳐 버린 날들이 많았습니다. 손안의 작은 창을 덮고 성경을 펼치는 용기를 저희에게 주시기 바랍니다.
고난 가운데 계신 성도들을 기억하여 주옵소서. 병상에 누워 뼈가 쑤시는 밤을 지나는 이들에게 주님의 음성을 들려주시고, 그 아픔이 벌이 아니라 다듬으시는 손길임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그들이 구덩이의 문턱에서 생명의 빛을 보게 하여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대속물을 친히 마련하신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사람이 치를 수 없는 값을 주님이 치르셨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를 주님이 보내 주셨습니다. 저희가 그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도록 저희 마음을 지켜 주옵소서.
은혜로 시작된 구원이 성화로 자라게 하여 주옵소서. 용서받은 자리에 주저앉지 않고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길을 걷게 하시며, 사랑 안에서 온전해지는 날까지 저희를 붙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입술에서 나오는 옳은 말이 이웃을 베는 칼이 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사람을 외모로 대하지 않으시는 공의의 하나님, 저희도 그 저울을 닮기를 원합니다. 힘 있는 자와 힘없는 자에게 같은 온도로 말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에 먼저 귀 기울이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오늘 하루를 거룩하게 살아가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말씀을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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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퍼런스
-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대한성서공회, 1998. 본문 출처: https://www.bskorea.or.kr
- Matthew Henry, Commentary on the Whole Bible, Vol. 3 (Job to Song of Solomon), 1708–1710;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판 참조. (욥 32~34장 주해)
- John Wesley, Explanatory Notes upon the Old Testament, Bristol: William Pine, 1765. (욥기 32~34장 주해)
- John Wesley, “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 (Sermon 43, 1765), in The Works of John Wesley, Vol. 2, ed. Albert C. Outler, Nashville: Abingdon Press, 1985.
- John E. Hartley, The Book of Job,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88. (엘리후 담화 주해)
- John MacArthur, ed., The MacArthur Study Bible, Nashville: Word Publishing, 1997. (욥 32~34장 주)
- C. I. Scofield, ed., The Scofield Reference Bibl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09. (욥기 주)
- Henry M. Morris, The Remarkable Record of Job,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8.
- William D. Barrick, “Messianic Implications in Elihu’s ‘Mediator Speech’ (Job 33:23–28)”,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Annual Meeting 발표 논문, 2003년 11월 19일. (저자 공개본: drbarrick.org)
- Robert L. Alden, Jo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11, Nashville: Broadman & Holman, 1993.
- Charles H. Spurgeon, C. H. Spurgeon’s Autobiography, Vol. 1, London: Passmore & Alabaster, 1897. (1850년 1월 6일 콜체스터 회심 기록)
- John Wesley, The Journal of the Rev. John Wesley, ed. Nehemiah Curnock, London: Epworth Press, 1938. (1738년 5월 24일 기록)
- 이미지 출처(모두 위키미디어 공용에서 크기를 줄여 주소로 임베딩함): 타이마 구시가 사진, Richard Mortel, CC BY 2.0 / 타이마 기마상 암각화 사진, Nabataeus, CC BY 4.0 / 와디 룸 사막 사진, Daniel Case, CC BY-SA 3.0 / 가죽 포도주 부대 사진, Tamorlan, CC BY 3.0 / 인도 전통 물레 사진, Gannu03, CC BY-SA 4.0 / 워털루 빌리지 나무 차꼬 사진, WallyFromColumbia, 퍼블릭 도메인 / 루들룰 벨 네메키 점토판 사진, Zunkir, CC BY-SA 4.0 / 이집트 아니 파피루스 심장 저울 그림, 퍼블릭 도메인 / 찰스 스펄전 초상, 웨일스 국립도서관, 퍼블릭 도메인 / 존 웨슬리 초상, 웨일스 국립도서관, 퍼블릭 도메인 / 웨슬리 채플 사진, ProfDEH, CC BY-SA 3.0 / 올더스게이트 플레임 사진, Mike Peel, CC BY-SA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