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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차 (욥기 14장 ~ 욥기 16장)

겟세마네 동산의 오래된 올리브 나무들, Fallaner 촬영, CC BY-SA 4.0

겟세마네 동산의 오래된 올리브 나무들, Fallaner 촬영, CC BY-SA 4.0

7일차 (욥기 14장 ~ 욥기 16장)

본문

욥기 14장

  1.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2. 그는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아니하거늘
  3. 이와 같은 자를 주께서 눈여겨 보시나이까 나를 주 앞으로 이끌어서 재판하시나이까
  4.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5. 그의 날을 정하셨고 그의 달 수도 주께 있으므로 그의 규례를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사온즉
  6. 그에게서 눈을 돌이켜 그가 품꾼 같이 그의 날을 마칠 때까지 그를 홀로 있게 하옵소서
  7. 나무는 희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8.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9. 물 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뻗어서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
  10. 장정이라도 죽으면 소멸되나니 인생이 숨을 거두면 그가 어디 있느냐
  11. 물이 바다에서 줄어들고 강물이 잦아서 마름 같이
  12.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
  13. 주는 나를 스올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실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규례를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
  14. 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모든 고난의 날 동안을 참으면서 풀려나기를 기다리겠나이다
  15. 주께서는 나를 부르시겠고 나는 대답하겠나이다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기다리시겠나이다
  16. 그러하온데 이제 주께서 나의 걸음을 세시오니 나의 죄를 감찰하지 아니하시나이까
  17. 주는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고 내 죄악을 싸매시나이다
  18. 무너지는 산은 반드시 흩어지고 바위는 그 자리에서 옮겨가고
  19. 물은 돌을 닳게 하고 넘치는 물은 땅의 티끌을 씻어버리나이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사람의 희망을 끊으시나이다
  20. 주께서 사람을 영원히 이기셔서 떠나게 하시며 그의 얼굴 빛을 변하게 하시고 쫓아보내시오니
  21. 그의 아들들이 존귀하게 되어도 그가 알지 못하며 그들이 비천하게 되어도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
  22. 다만 그의 살이 아프고 그의 영혼이 애곡할 뿐이니이다

욥기 15장

  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2. 지혜로운 자가 어찌 헛된 지식으로 대답하겠느냐 어찌 동풍을 그의 복부에 채우겠느냐
  3. 어찌 도움이 되지 아니하는 이야기, 무익한 말로 변론하겠느냐
  4. 참으로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그만두어 하나님 앞에 묵도하기를 그치게 하는구나
  5. 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나니 네가 간사한 자의 혀를 좋아하는구나
  6. 너를 정죄한 것은 내가 아니요 네 입이라 네 입술이 네게 불리하게 증언하느니라
  7. 네가 제일 먼저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
  8.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네가 들었느냐 지혜를 홀로 가졌느냐
  9. 네가 아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냐 네가 깨달은 것을 우리가 소유하지 못한 것이 무엇이냐
  10. 우리 중에는 머리가 흰 사람도 있고 연로한 사람도 있고 네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느니라
  11. 하나님의 위로와 은밀하게 하시는 말씀이 네게 작은 것이냐
  12. 어찌하여 네 마음에 불만스러워하며 네 눈을 번뜩거리며
  13. 네 영이 하나님께 분노를 터뜨리며 네 입을 놀리느냐
  14. 사람이 어찌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찌 의롭겠느냐
  15. 하나님은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가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16. 하물며 악을 저지르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을 용납하시겠느냐
  17. 내가 네게 보이리니 내게서 들으라 내가 본 것을 설명하리라
  18. 이는 곧 지혜로운 자들이 전하여 준 것이니 그들의 조상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9. 이 땅은 그들에게만 주셨으므로 외인은 그들 중에 왕래하지 못하였느니라
  20. 그 말에 이르기를 악인은 그의 일평생에 고통을 당하며 포악자의 햇수는 정해졌으므로
  21. 그의 귀에는 무서운 소리가 들리고 그가 평안할 때에 멸망시키는 자가 그에게 이르리니
  22. 그가 어두운 데서 나오기를 바라지 못하고 칼날이 숨어서 기다리느니라
  23. 그는 헤매며 음식을 구하여 이르기를 어디 있느냐 하며 흑암의 날이 가까운 줄을 스스로 아느니라
  24. 환난과 역경이 그를 두렵게 하며 싸움을 준비한 왕처럼 그를 쳐서 이기리라
  25. 이는 그의 손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교만하여 전능자에게 힘을 과시하였음이니라
  26. 그는 목을 세우고 방패를 들고 하나님께 달려드니
  27. 그의 얼굴에는 살이 찌고 허리에는 기름이 엉기었고
  28. 그는 황폐한 성읍, 사람이 살지 아니하는 집, 돌무더기가 될 곳에 거주하였음이니라
  29. 그는 부요하지 못하고 재산이 보존되지 못하고 그의 소유가 땅에서 증식되지 못할 것이라
  30. 어두운 곳을 떠나지 못하리니 불꽃이 그의 가지를 말릴 것이라 하나님의 입김으로 그가 불려가리라
  31. 그가 스스로 속아 허무한 것을 믿지 아니할 것은 허무한 것이 그의 보응이 될 것임이라
  32. 그의 날이 이르기 전에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인즉 그의 가지가 푸르지 못하리니
  33. 포도 열매가 익기 전에 떨어짐 같고 감람 꽃이 곧 떨어짐 같으리라
  34. 경건하지 못한 무리는 자식을 낳지 못할 것이며 뇌물을 받는 자의 장막은 불탈 것이라
  35. 그들은 재난을 잉태하고 죄악을 낳으며 그들의 뱃속에 속임을 준비하느니라

욥기 16장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3. 헛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네가 무엇에 자극을 받아 이같이 대답하는가
  4.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 자리에 있다 하자 나도 그럴 듯한 말로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
  5. 그래도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 하며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근심을 풀었으리라
  6. 내가 말하여도 내 근심이 풀리지 아니하고 잠잠하여도 내 아픔이 줄어들지 않으리라
  7. 이제 주께서 나를 피로하게 하시고 나의 온 집안을 패망하게 하셨나이다
  8. 주께서 나를 시들게 하셨으니 이는 나를 향하여 증거를 삼으심이라 나의 파리한 모습이 일어나서 대면하여 내 앞에서 증언하리이다
  9. 그는 진노하사 나를 찢고 적대시 하시며 나를 향하여 이를 갈고 원수가 되어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보시고
  10. 무리들은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나를 모욕하여 뺨을 치며 함께 모여 나를 대적하는구나
  11. 하나님이 나를 악인에게 넘기시며 행악자의 손에 던지셨구나
  12. 내가 평안하더니 그가 나를 꺾으시며 내 목을 잡아 나를 부서뜨리시며 나를 세워 과녁을 삼으시고
  13. 그의 화살들이 사방에서 날아와 사정 없이 나를 쏨으로 그는 내 콩팥들을 꿰뚫고 그는 내 쓸개가 땅에 흘러나오게 하시는구나
  14. 그가 나를 치고 다시 치며 용사 같이 내게 달려드시니
  15. 내가 굵은 베를 꿰매어 내 피부에 덮고 내 뿔을 티끌에 더럽혔구나
  16. 내 얼굴은 울음으로 붉었고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구나
  17.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
  18. 땅아 내 피를 가리지 말라 나의 부르짖음이 쉴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하라
  19.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
  20.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
  21.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중재하시기를 원하노니
  22. 수년이 지나면 나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갈 것임이니라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본문 해설

그루터기에서 다시 돋는 싹: 욥기 14~16장

오늘은 연대기 일독의 일곱째 날입니다. 어제 우리는 욥이 소발의 공식 신학에 맞서 짐승과 새와 땅과 바다를 증인석에 세우고, 죽음을 각오하고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겠다고 선언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오늘 읽는 세 장에서 욥의 시선은 한 사람의 일생 전체로 넓어집니다. 꽃처럼 지는 인생을 노래하고, 죽은 사람이 다시 살 수 있는지를 묻고, 마침내 하늘에 계신 증인을 부르는 대목까지 함께 따라가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짜임새를 먼저 눈에 담아 두면 좋겠습니다. 14장은 어제 읽은 13장의 기도가 그대로 이어지는 욥의 탄식 마지막 부분이고, 15장부터는 변론의 두 번째 순환이 시작됩니다. 엘리바스가 다시 입을 열고(15장), 욥이 응수하는(16장) 흐름입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욥기 삽화』 중 한 장면, 『Life of William Blake』(1880) 제2권 수록, 퍼블릭 도메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욥기 삽화』 중 한 장면, 『Life of William Blake』(1880) 제2권 수록, 퍼블릭 도메인

두 번째 순환에서 달라진 점은 무엇일까요? 친구들의 말투가 눈에 띄게 거칠어졌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순환에서 엘리바스는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싫증을 내겠느냐” 하며 조심스럽게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첫마디부터 욥의 말을 헛된 지식과 동풍이라 부르며 몰아붙입니다.

한편 욥의 말에도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는 땅에서는 아무 증인을 찾지 못했으나 하늘에 증인이 계신다는 고백에 이르렀습니다(16:19). 앞서 9장에서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하고 탄식했던 사람이 오늘은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 하고 외칩니다. 어둠 속에서 믿음이 한 걸음 자라난 셈입니다.

꽃과 그림자로 그려진 인생

14장을 이해하려면 고대 근동 사람들이 인생을 어떤 눈으로 보았는지를 알아 두면 좋습니다. 그 시대에는 사람이 일찍 죽는 일이 매우 흔했습니다. 유아 사망률이 높았고, 가뭄과 전염병과 전쟁이 수시로 마을을 덮쳤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탈 샤하르에서 촬영한 아네모네 코로나리아, Zachi Evenor 촬영, CC BY 2.0
이스라엘 탈 샤하르에서 촬영한 아네모네 코로나리아, Zachi Evenor 촬영, CC BY 2.0

그래서 성경은 인생의 짧음을 말할 때 자주 들꽃과 그림자와 풀을 끌어옵니다. 위 사진의 아네모네는 이스라엘의 봄 들판을 붉게 덮다가 우기가 끝나고 더위가 닥치면 불과 몇 주 만에 사라지는 꽃입니다. 시편 103편 15~16절과 이사야 40장 6~8절도 같은 그림을 씁니다.

그러면 성경이 인생의 짧음을 말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사람을 낙심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분을 바라보게 하려는 것입니다. 시편 90편의 모세는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짧음을 아는 사람만이 오늘을 제대로 쓰게 되는 법입니다.

고대 근동의 장례 관습도 함께 알아 두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날 안에 시신을 가족의 암굴 무덤이나 땅에 안치했고, 유족은 겉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은 채 재를 머리에 뿌렸습니다. 곡하는 일이 이레 동안 이어지기도 했으니, 욥의 세 친구가 이레 동안 말없이 앉아 있던 모습도 그 관습 안에 있었던 셈입니다.

이런 배경을 알면 욥이 지금 산 사람이면서 이미 장례의 예복을 입고 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는 재 위에 앉아 있었고(욥 2:8), 16장 15절에서는 굵은 베를 피부에 꿰매어 덮었다고 말합니다. 살아 있으나 자기 장례를 치르는 사람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짚어 두고 싶습니다. 죽음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세상에 두신 질서가 아니었습니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롬 5:12). 그러니 욥이 죽음을 보며 느낀 막막함은 죄가 가져온 비정상에 대한 정직한 반응이었던 것입니다.

욥기 14장: 품꾼의 날처럼 짧은 생애

14장은 한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14:1). 여기서 “여인에게서 태어난"이라는 표현은 사람의 연약함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욥은 자기만의 이야기를 하다가 이제 모든 인간의 처지를 대신 아뢰기 시작했습니다.

2절의 두 비유는 짧지만 깊습니다. 사람은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고,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꽃은 아름답지만 금방 사라지는 것을 가리키고, 그림자는 붙잡을 수 없는 것을 가리킵니다. 두 비유가 겹쳐지면서 인생의 덧없음이 한층 또렷해지는 셈입니다.

보리를 거두는 일꾼들(1919년), 미국 식민지 사진부 촬영, 미국 의회도서관 소장, 퍼블릭 도메인
보리를 거두는 일꾼들(1919년), 미국 식민지 사진부 촬영, 미국 의회도서관 소장, 퍼블릭 도메인

4절에서 욥은 뜻밖의 고백을 합니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14:4). 죄 가운데 태어난 사람에게서 깨끗한 것이 나올 수 없다는 뜻입니다. 친구들에게는 억울함을 주장하던 욥이,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의 타락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뒤에 다윗의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시편 51편 5절에서 그는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아뢰었습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원죄라고 부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사람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기 전에 이미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5~6절에서 욥은 하나님께 두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사람의 날과 달 수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 그러니 품꾼이 하루 일을 마치듯 조용히 끝낼 수 있게 눈을 돌려 주십시오 하는 요청입니다. 위 사진 속 일꾼들처럼 품꾼은 해가 지면 삯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욥은 그 저녁을 기다리고 있었던 셈입니다.

나무는 희망이 있으나: 14장 7~12절

7~9절은 오늘 본문에서 가장 애절한 대목입니다. “나무는 희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밑동만 남기고 베어 낸 나무에서 새순이 올라오는 모습을 욥은 직접 보았을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지금도 이스라엘 땅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올리브 나무는 줄기가 죽어도 뿌리에서 새 가지가 솟아올라 수백 년을 살아갑니다. 글 맨 위의 겟세마네 올리브 나무들도 오래된 뿌리에서 거듭 새 줄기가 올라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욥의 비유는 들판에서 길어 올린 생생한 관찰이었습니다.

그런데 10절에서 욥의 목소리가 뚝 떨어집니다. “장정이라도 죽으면 소멸되나니 인생이 숨을 거두면 그가 어디 있느냐.” 나무에게는 있는 희망이 사람에게는 없어 보인다는 절규입니다. 그는 11~12절에서 마른 강바닥처럼 사람도 그렇게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조심해서 읽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욥은 부활이 없다고 교리를 선포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현실을 호소한 것입니다. 바로 다음 구절에서 그 자신이 다시 살아나는 날을 그려 보고 있습니다. 고통 속의 말은 한 문장만 떼어 읽지 말고 흐름 전체로 읽어야 하는 법입니다.

13절의 기도는 참 아름답습니다. “주는 나를 스올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실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규례를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 욥은 죽음을 하나님이 정하신 때까지 잠시 숨겨 두시는 자리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무덤이 영원한 끝이 아니라 대기실일 수 있다는 생각이 여기서 싹트는 것입니다.

다시 살리이까: 부활 소망의 첫 싹

14장 14절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14:14). 사람이 죽은 뒤에 다시 사는 일이 가능한지를 정면으로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욥은 곧바로 나의 모든 고난의 날 동안을 참으면서 풀려나기를 기다리겠다고 덧붙입니다.

“풀려나기를"로 옮긴 히브리어 “할리파"는 본래 교대를 뜻하는 낱말입니다. 군인이 초소에서 다음 사람과 교대하거나, 옷을 갈아입을 때 쓰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욥의 말은 보초를 서듯 고난의 자리를 지키며 교대 시간을 기다리겠다는 고백으로 읽힙니다. 참으로 놀라운 믿음입니다.

15절은 그 기다림의 내용을 보여 줍니다. “주께서는 나를 부르시겠고 나는 대답하겠나이다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기다리시겠나이다”(14:15). 하나님이 자기를 다시 부르실 날을 그려 본 것입니다. 어제 본문에서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13:22) 하고 청하던 사람이, 이제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날 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욥의 이 질문에 성경은 어떻게 답할까요? 답은 또렷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선언하셨습니다(요 11:25). 다니엘 12장 2절은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던 자들이 깨어날 날을 미리 알려 주었고,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증언했습니다(고전 15:20).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욥의 질문에 대한 답을 손에 들고 이 본문을 읽는 셈입니다. 욥은 어둠 속에서 더듬으며 물었고, 우리는 빈 무덤이 열린 뒤에 이 질문을 읽습니다. 같은 질문을 품은 사람에게 이보다 더 큰 위로가 또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이미 대답이 주어졌습니다.

주머니에 봉하신 허물: 14장 16~22절

16~17절에서 욥의 어조가 다시 어두워집니다. 하나님이 자기 걸음을 하나하나 세시고,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고 죄악을 싸매신다고 호소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중요한 문서나 귀중품은 자루에 담아 입구를 끈으로 묶고 진흙 덩이에 도장을 눌러 봉인했습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의 인장이 찍힌 봉니, 이스라엘 박물관 소장, Tamir Zegman 촬영, CC BY-SA 4.0
유다 왕 히스기야의 인장이 찍힌 봉니, 이스라엘 박물관 소장, Tamir Zegman 촬영, CC BY-SA 4.0

위 사진은 유다 왕 히스기야의 인장이 찍힌 작은 진흙 덩이입니다. 이런 봉인은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보관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기 죄를 그렇게 봉해 두고 잊지 않고 보관하신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이 그림을 뒤집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신다고 노래했고(미 7:19), 시편 103편 12절은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우리 죄과를 옮기신다고 선언합니다. 봉인되어 보관되던 죄의 목록이 십자가에서 지워진 셈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라고 표현했습니다(골 2:14).

18~22절에서 욥은 다시 사람의 희망이 끊어지는 현실을 노래합니다. 산이 무너지고 바위가 옮겨지며, 물이 돌을 닳게 하고 넘치는 물이 흙을 씻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사람의 희망도 끊으신다고 말합니다.

요르단 와디 무지브 협곡, Berthold Werner 촬영, CC BY 3.0
요르단 와디 무지브 협곡, Berthold Werner 촬영, CC BY 3.0

위 사진의 협곡을 보시면 욥의 관찰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단단한 사암을 저렇게 깎아 낸 것은 바로 물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흐르는 물이 바위를 닳게 한 것인데, 욥은 가장 단단해 보이는 것도 결국 깎여 나간다는 사실을 거기서 읽어 냈습니다.

22절의 마지막 한 문장은 유난히 쓸쓸합니다. “다만 그의 살이 아프고 그의 영혼이 애곡할 뿐이니이다”(14:22). 여기서 14장이 끝나는데, 이 어두운 자리에서 두 장 뒤에 하늘에 계신 증인을 부르게 될 사람이 바로 그였습니다. 하나님은 어둠을 그냥 지나가게 하지 않으시고 그 안에서 믿음을 길러 가십니다.

욥기 15장: 엘리바스의 두 번째 공격

15장은 엘리바스의 두 번째 발언입니다. 첫 발언에서는 꽤 정중했던 그가 이번에는 처음부터 날을 세웁니다. 욥의 말을 헛된 지식이라 부르고, 동풍을 복부에 채운 것 같다고 비꼽니다(15:2).

아라비아 반도와 북동 아프리카를 덮은 거대한 모래먼지(2021년 6월 17일), NASA MODIS 관측, 퍼블릭 도메인
아라비아 반도와 북동 아프리카를 덮은 거대한 모래먼지(2021년 6월 17일), NASA MODIS 관측, 퍼블릭 도메인

“동풍"은 아라비아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겁고 메마른 바람입니다. 위성에서 내려다본 위 사진처럼 이 바람이 불면 모래먼지가 하늘을 덮고 곡식이 말라 버렸습니다. 그러니 동풍을 배에 채웠다는 말은 알맹이 없는 말로 배를 불린다는 뜻의 심한 모욕이었습니다.

4~6절에서 엘리바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욥이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그만두게 하고 기도를 그치게 한다고 몰아세우며, 너를 정죄한 것은 내가 아니라 네 입이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네 말이 네 죄를 증명했다"는 선고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고통 속에서 나온 말을 붙잡아 그 사람의 신앙 전체를 판정하는 일은 매우 위험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42장에서 욥의 거친 말을 바로잡으시면서도 그를 “내 종"이라 부르셨고, 오히려 엘리바스를 향해 분노하셨습니다(욥 42:7).

전통과 연륜을 앞세운 변론

7~10절에서 엘리바스는 연이어 질문을 던집니다. “네가 제일 먼저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 쉽게 말씀드리면, 네가 아담보다 먼저 태어났느냐는 비꼼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독점한 듯 말하는 욥을 깎아내리려는 말인 셈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질문이 창조 순서를 당연한 사실로 전제한다는 점입니다. 사람보다 산이 먼저 있었고, 사람의 시작에는 제일 먼저 난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첫 사람을 아담이라 부르며 실제 역사 속 인물로 다룹니다(눅 3:38, 롬 5:12~21). 욥기의 대화 속에도 그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 있는 셈입니다.

10절에서 엘리바스는 흰머리와 연로함을 내세웁니다. 어른의 경험을 존중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곧 진리의 보증은 아닙니다. 뒤에 등장하는 젊은 엘리후도 “나이가 많은 자가 말할 것이요 연륜이 많은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노라” 하면서 바로 그 전제를 되짚게 됩니다(욥 32:7~9).

14~16절은 엘리바스가 말한 교리 가운데 가장 묵직한 대목입니다. 사람이 어찌 깨끗하겠으며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찌 의롭겠느냐고 묻고, 하늘조차 하나님 보시기에 부정하다고 말합니다. 이 말 자체는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같은 진리를 욥은 하나님께 아뢰는 고백으로 썼고 엘리바스는 사람을 치는 무기로 썼다는 차이입니다. 욥은 14장 4절에서 이미 같은 내용을 말했습니다. 같은 교리가 기도가 되면 은혜의 문이 열리지만, 판결문이 되면 사람을 짓누르게 되는 법입니다.

17~19절에서 그는 조상들로부터 전해 받은 지혜를 내세웁니다. 그런데 19절의 “이 땅은 그들에게만 주셨으므로 외인은 그들 중에 왕래하지 못하였느니라"는 말에는 우리 전통은 섞이지 않은 순수한 것이라는 자부심이 묻어 있습니다.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설 때, 그 전통은 사람을 가두는 울타리가 되고 맙니다.

악인의 종말에 관한 긴 묘사

20~35절은 악인의 종말을 길게 묘사한 단락입니다. 악인은 평생 고통을 당하고, 귀에는 무서운 소리가 들리며, 흑암의 날이 가까운 줄을 스스로 안다고 말합니다. 재산이 보존되지 못하고 가지가 푸르지 못하며, 포도가 익기 전에 떨어지고 감람 꽃이 곧 떨어진다는 비유도 거기에 뒤따랐습니다.

이 묘사를 읽다 보면 한 가지가 분명해집니다. 엘리바스는 욥의 모습을 그대로 악인의 명세서에 옮겨 적고 있는 것입니다. 재산을 잃었고, 자녀를 잃었고, 몸이 병들었으며, 밤마다 무서운 꿈에 시달리는 사람이 바로 욥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부르지 않았을 뿐 손가락은 분명히 욥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이런 방식이 익숙하게 느껴지시나요? 이름을 말하지 않고 일반론으로 말하면서 모두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게 하는 화법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런 말은 겉으로는 점잖지만 상대에게는 공개 재판처럼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아르논 강 협곡에서 바라본 사해 일대의 일몰(1919년), 미국 식민지 사진부 촬영, 미국 의회도서관 소장, 퍼블릭 도메인
아르논 강 협곡에서 바라본 사해 일대의 일몰(1919년), 미국 식민지 사진부 촬영, 미국 의회도서관 소장, 퍼블릭 도메인

그런데 엘리바스의 묘사가 전부 틀린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대적하는 사람의 마지막은 성경이 거듭 경고하는 대로 참으로 두렵습니다. 문제는 그 경고를 지금 아파하는 의인에게 겨누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별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성경은 악인의 형통이 잠시뿐이라는 진리와 의인에게도 고난이 있다는 진리를 함께 가르칩니다. 두 진리를 모두 붙들면 균형이 생기는데, 한쪽만 붙들면 반드시 사람을 상하게 하는 법입니다.

엘리바스는 앞의 진리만 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눈앞의 고난을 보면 곧바로 죄의 증거라고 읽어 냈던 것입니다. 반대로 뒤의 진리만 붙들면 죄에 대한 경고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공의가 흐려집니다. 성경 전체를 함께 읽는 일이 그래서 반드시 필요한 셈입니다.

28절의 “황폐한 성읍, 사람이 살지 아니하는 집, 돌무더기가 될 곳"이라는 표현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고대 근동에는 심판을 받아 폐허가 된 성읍 터가 실제로 많았고, 그런 자리에는 아무도 들어가 살지 않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엘리바스는 그 생생한 풍경을 빌려 악인의 끝을 그려 보인 것입니다.

욥기 16장: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

16장에서 욥이 응수합니다. 첫마디가 뼈를 찌릅니다.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16:2). 위로자라는 말과 재난이라는 말을 한 자리에 붙여 놓은 표현입니다. 위로하러 와서 재난을 보태는 사람들이라는 뜻인 셈입니다.

이 표현의 원어를 조금 들여다보겠습니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에서 “재난"으로 옮긴 히브리어 “아말"은 수고와 괴로움과 헛된 고생을 함께 뜻하는 낱말입니다. 그러니 욥의 말은 위로한다면서 괴로움만 보태는 사람들이라는 뜻이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위로하러 갔다가 오히려 상처를 남긴 경험이 혹시 있으시지 않나요? 많은 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실 것입니다. 욥기 16장은 위로의 실패를 성경이 정면으로 다룬 드문 본문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큰 선물입니다.

4~5절에서 욥은 뜻깊은 가정을 해 봅니다. 너희 마음이 내 자리에 있다면 나도 그럴 듯한 말로 너희를 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나는 입술의 위로로 너희 근심을 풀어 주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픈 사람이 오히려 위로하는 법을 가르치는 장면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위로는 무엇일까요? 욥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상대를 강하게 해 주고 근심을 덜어 주는 말입니다. 로마서 12장 15절의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명령이 바로 이것이고, 데살로니가전서 5장 14절의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라는 권면도 같은 자리를 가리킵니다.

6절의 고백은 많은 분이 공감하실 것입니다. “내가 말하여도 내 근심이 풀리지 아니하고 잠잠하여도 내 아픔이 줄어들지 않으리라.” 말해도 소용없고 참아도 나아지지 않는 상태입니다. 고통이 깊어지면 어느 길도 출구로 보이지 않을 때가 찾아오는 법입니다.

과녁이 된 사람: 16장 7~17절

7~14절에서 욥은 하나님을 향해 격한 말을 쏟아 놓습니다. 자기를 시들게 하셨고, 찢으셨고, 이를 갈며 원수처럼 보시고, 과녁으로 세워 사방에서 화살을 쏘신다고 말합니다. 활 쏘는 과녁이라는 비유만큼 자기 처지를 또렷하게 드러내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두 가지를 함께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첫째, 이것은 욥의 느낌을 정확하게 기록한 말이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바른 설명이 아닙니다. 둘째, 하나님은 그런 말을 쏟아 놓는 종을 내치지 않으셨습니다.

15절에서 욥은 굵은 베를 꿰매어 피부에 덮었다고 말합니다. 굵은 베, 곧 거친 삼베옷은 애통과 회개를 나타내는 옷이었습니다. 그런데 욥은 그 옷을 입은 것이 아니라 피부에 꿰매어 붙였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슬픔이 벗을 수 없는 살가죽처럼 되었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같은 절의 “내 뿔을 티끌에 더럽혔구나"라는 말도 설명이 필요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뿔은 힘과 존귀의 상징이었습니다. 짐승의 뿔이 그 짐승의 위세를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그 뿔을 흙에 처박았다는 것은 자기 존귀가 완전히 꺾였다는 고백입니다.

17절은 중요한 한 문장입니다.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16:17). 욥은 거친 말을 쏟아 놓은 바로 다음에 자기 손과 기도의 정결함을 말합니다.

이것이 모순처럼 보이시나요? 아닙니다. 아픔을 정직하게 토하는 것과 손을 더럽히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거칠게 아뢴 날에도 이웃에게 폭력을 쓰지 않았고 기도의 자리를 더럽히지 않았다면, 그 사람의 손은 여전히 깨끗한 손입니다.

하늘에 계신 증인과 중보자

18절에서 욥은 땅을 향해 외칩니다. “땅아 내 피를 가리지 말라 나의 부르짖음이 쉴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하라.” 창세기 4장 10절에서 아벨의 피가 땅에서 하나님께 호소했던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외침입니다. 억울하게 흘린 피는 덮이지 않고 끝까지 증언한다는 믿음이 거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19절에서 오늘 본문의 정점이 터져 나옵니다.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 땅에서는 아무도 자기 편을 들어 주지 않았으나, 하늘에는 자기를 아는 분이 계신다는 고백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믿음의 도약입니다.

이 구절의 원어를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증인"은 히브리어 “에드"이고, “중보자"로 옮긴 낱말은 아람어 계열의 “사헤드"로 증인 또는 보증인을 뜻합니다. 같은 뜻의 두 낱말을 나란히 놓아 뜻을 겹으로 강조한 표현인 셈입니다. 구약학자 존 하틀리도 NICOT 욥기 주석에서 이 두 낱말을 짝으로 읽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21절에서 욥은 그 증인에게 무엇을 구할까요?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중재하시기를 원하노니"라고 말합니다. 9장 33절에서 손을 얹을 판결자가 없다고 탄식했던 사람이, 이제 그 중재자가 하늘에 계신다고 고백하는 자리에 이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증인은 누구일까요? 하나님은 때가 차매 그분을 보내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선포하고(딤전 2:5), 요한 사도는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증언합니다(요일 2:1).

22절에서 욥은 다시 현실로 돌아옵니다. “수년이 지나면 나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갈 것임이니라.” 소망을 고백한 뒤에도 몸은 여전히 아프고 길은 여전히 어둡습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 사람의 걸음은 전과 같지 않습니다. 그 믿음은 19장에서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라는 더 큰 외침으로 자라나게 됩니다.

묵상과 적용

오늘 본문이 우리 손에 먼저 쥐어 주는 것은 인생의 길이를 정직하게 보는 눈입니다. 욥은 사람을 꽃과 그림자에 빗댔고, 품꾼이 저녁을 기다리듯 자기 날이 끝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이 고백을 우리 삶으로 가져오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오늘 하루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여러분은 자기 인생이 짧다는 사실을 언제 가장 또렷하게 느끼시나요? 대개 장례식장에서, 건강 검진 결과 앞에서, 부모님의 흰머리를 볼 때일 것입니다. 그 느낌을 그냥 흘려보내지 마시고 하루를 어떻게 쓸지 다시 정하는 계기로 삼아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의 기도처럼 날 계수함을 배우는 사람이 지혜를 얻게 됩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제안해 보겠습니다. 이번 주에 미루어 둔 화해의 전화를 한 통 걸어 보십시오. 부모님께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자녀와 눈을 맞추고 밥을 먹고, 신앙의 유산으로 남기고 싶은 한 가지를 적어 보셔도 좋겠습니다. 인생이 꽃과 같다면 꽃이 피어 있는 동안에 해야 할 일이 분명히 있는 법입니다.

둘째로, 14장 7절의 그루터기 비유를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욥은 나무에게는 희망이 있는데 사람에게는 없어 보인다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자리에 정반대의 소식을 놓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는 다시 일어난다는 소식입니다.

이것은 추상적인 교리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이를 먼저 보낸 가정에서, 병실에서 밤을 지키는 보호자에게, 중년의 실패 앞에 주저앉은 사람에게 그루터기에서 새순이 돋는 그림은 실제적인 힘이 됩니다. 부활은 마지막 날의 사건이면서 오늘을 버티게 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엘리바스의 자리를 다시 경계하게 됩니다. 그는 틀린 교리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깨끗할 수 없다는 그의 말은 성경의 가르침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를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디서 갈라진 것일까요? 욥은 같은 진리를 하나님께 아뢰었고 엘리바스는 그 진리를 사람에게 던졌다는 차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을 하기 전에 두 가지를 함께 물어야 합니다. 이 말이 사실인지, 그리고 이 말이 지금 이 사람을 세우는지를 함께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과 직장에서도 이 점검은 그대로 쓰입니다. 자녀의 성적이 떨어졌을 때 “노력이 부족했다"는 사실 지적만으로 끝내지 마시고, 아이가 지금 무엇 때문에 지쳤는지를 먼저 물어보십시오. 동료의 실수를 지적해야 할 때도 사실과 함께 그 사람의 자리를 헤아리는 말을 한 문장 더 얹어 보시기 바랍니다.

넷째로, 16장 4~5절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해 봅시다. 욥은 자기가 그 자리에 있다면 입술의 위로로 근심을 풀어 주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위로의 기술을 알려 주는 짧은 교과서와도 같습니다. 상대를 강하게 하는 말, 근심의 무게를 덜어 주는 말이 참된 위로라는 뜻입니다.

실천은 어렵지 않습니다. 아픈 사람에게 원인을 묻기보다 “지금 가장 힘든 게 뭐예요” 하고 물어보고, 해결책을 내놓기보다 들은 말을 다시 정리해 들려주면 됩니다. 그리고 돌아올 때 다음에 또 오겠다는 약속을 남기십시오. 꾸준히 찾아오는 사람 하나가 열 편의 조언보다 큰 힘이 됩니다.

다섯째로, 오늘 본문의 중심인 하늘에 계신 증인을 바라봅시다. 욥은 땅에서 자기를 변호해 줄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 아내도 친구도 종들도 그에게서 돌아섭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에게는 훨씬 더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름까지 알려진 중보자가 계십니다. 히브리서 7장 25절은 그분이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고 증언합니다. 오늘 아무도 내 사정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이 한 구절을 소리 내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두 은혜를 구별해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칭의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고 성화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하늘의 중보자가 우리를 변호해 주시기에 우리는 담대하고, 그 은혜가 우리 안에서 자라기에 우리는 거룩해져 갑니다. 두 은혜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여섯째로, 오늘 본문은 기도의 말투에 대한 자유도 함께 가르쳐 줍니다. 욥은 하나님께 과녁이 되었다고까지 아뢰었습니다. 그런 거친 말이 기록으로 남았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다듬어진 문장만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그렇다고 아무 말이나 해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욥도 마지막에는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욥 42:6). 정직하게 쏟아 놓되 마지막 결론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성숙한 기도의 모습입니다. 오늘 기도의 자리에서 솔직함과 경외를 함께 품어 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재림의 소망을 붙듭니다. 욥이 “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하고 물었던 질문은 그리스도의 재림에서 완전히 답을 얻습니다. 주께서 강림하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날 것이고(살전 4:16), 그분은 천 년 동안 이 땅을 다스리실 것입니다(계 20:4~6). 그날을 바라보는 사람은 오늘의 고난을 다르게 견뎌 냅니다.

예화

존 웨슬리: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함께 계신 것

인생의 짧음과 그 끝에서 드러나는 소망을 가장 잘 보여 준 사람 가운데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가 있습니다. 그는 1703년 6월 17일 영국 엡워스의 목사관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목사관에 불이 났을 때 이층 창문에서 가까스로 구조된 일이 있었는데, 웨슬리는 훗날 그날의 자신을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뭇가지라고 불렀습니다.

조지 롬니가 그린 존 웨슬리의 초상, 퍼블릭 도메인
조지 롬니가 그린 존 웨슬리의 초상, 퍼블릭 도메인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날은 1738년 5월 24일 저녁입니다. 런던 올더스게이트 가의 작은 모임에서 누군가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을 때, 웨슬리는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그 순간 그리스도께서 자기 죄를 제거해 주셨다는 확신을 받았다고 일기에 적습니다.

그 뒤 오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는 말을 타고 영국 전역을 다녔습니다. 평생 이동한 거리가 사십만 킬로미터에 이르고, 설교한 횟수는 사만 번을 넘었다고 전해집니다. 교회에서 쫓겨나면 들판에서, 광산 입구에서, 장터에서 설교했습니다. 그가 남긴 “세상은 나의 교구"라는 말은 이 삶의 요약인 셈입니다.

런던 시티 로드의 웨슬리 채플, Dr Neil Clifton 촬영, CC BY-SA 2.0
런던 시티 로드의 웨슬리 채플, Dr Neil Clifton 촬영, CC BY-SA 2.0

1791년 3월 2일 아침, 여든여덟 번째 생일을 몇 달 앞둔 그는 런던 시티 로드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침상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널리 전해지고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숨이 가빠 길게 말할 수 없는 중에도 그는 이 한 문장을 거듭 되뇌었다고 합니다.

그는 또 찬송 한 구절을 부르려 했다고 전해집니다. 아이작 와츠가 시편 146편을 풀어 짓고 웨슬리가 다듬어 즐겨 부르던 “내 숨이 있는 동안 나의 창조주를 찬양하리라"라는 찬송이었습니다. 목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 “찬양하리라, 찬양하리라” 하는 말만 반복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웨슬리가 평소에 자기 교인들을 두고 우리 성도들은 잘 죽는다고 말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말은 고통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욥이 “주께서는 나를 부르시겠고 나는 대답하겠나이다” 하고 그려 보았던 그 장면을, 웨슬리는 실제로 살아 냈습니다.

데이비드 리빙스턴: 잠베지 강변의 무덤 앞에서

꽃처럼 지는 인생을 가장 아프게 경험한 선교사가 있습니다. 1813년 3월 19일 스코틀랜드 블랜타이어에서 태어난 데이비드 리빙스턴입니다. 열 살 때부터 방직 공장에서 일하며 책을 읽었고, 의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토머스 애넌이 촬영한 데이비드 리빙스턴,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소장, 퍼블릭 도메인
토머스 애넌이 촬영한 데이비드 리빙스턴,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소장, 퍼블릭 도메인

1845년 그는 선교사 로버트 모펏의 딸 메리와 가정을 이룹니다. 메리는 아프리카에서 태어나 그 땅의 언어를 아는 사람이었고, 남편과 함께 수레를 끌고 사막을 건넜습니다.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도 그 여정을 함께했으니, 그 고생을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아내 메리 모펏 리빙스턴(1821~1862), 퍼블릭 도메인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아내 메리 모펏 리빙스턴(1821~1862), 퍼블릭 도메인

1862년, 메리는 제2차 잠베지 탐험에 합류하려고 아프리카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넉 달이 되지 않아 말라리아에 걸렸고, 그해 4월 27일 잠베지 강변 슈팡가에서 마흔한 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남편의 팔에 안겨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잠베지 강변 슈팡가에 있는 메리 리빙스턴의 무덤, 말라위 역사과학협회 제공, CC BY-SA 4.0
잠베지 강변 슈팡가에 있는 메리 리빙스턴의 무덤, 말라위 역사과학협회 제공, CC BY-SA 4.0

사람들은 커다란 바오밥 나무 아래에 그녀를 묻었습니다. 평생 어떤 위험 앞에서도 꺾이지 않던 리빙스턴이 이때는 속으로 무너지고 맙니다. 그는 일기에 내 생애 처음으로 죽는 것이 괜찮게 여겨진다고 적었습니다. 욥이 “그런즉 그치시고 나를 버려두사” 하고 아뢰었던 그 심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서 사명을 놓지 않았습니다. 아내의 무덤에서 일어나 다시 강을 따라 올라갔고, 이후 십 년을 더 아프리카에서 지냅니다. 1873년 5월 1일 아침, 그는 지금의 잠비아 치탐보 마을의 오두막에서 침상 옆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로 숨을 거둔 채 발견되었습니다.

그의 아프리카 동료 추마와 수시는 그 시신을 소금에 절여 보존하고, 아홉 달 동안 천 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운반해 해안까지 데려갑니다. 심장은 그가 사랑한 아프리카 땅에 묻고, 유해는 영국으로 보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했습니다. 두 사람의 그 걸음이야말로 복음이 아프리카에 뿌리를 내렸다는 증거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에서 어떤 위로를 얻으시나요? 믿음의 사람도 꽃처럼 지고 그림자처럼 지나간다는 사실, 그러나 그 짧은 생애가 하나님의 손에서는 결코 헛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욥도, 웨슬리도, 리빙스턴 부부도 모두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모두 하늘에 계신 증인 앞에서 다시 불리는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도

먼저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인생이 꽃과 같고 그림자와 같음을 깨달아 오늘 하루를 허투루 보내지 않게 해 주시기를 구하며,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부활의 확신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아울러 옳은 교리를 이웃을 치는 무기로 쓰지 않고 하나님께 아뢰는 고백으로 삼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가정을 위해서는, 함께 있는 시간이 영원하지 않음을 기억하여 서로에게 사랑의 말을 미루지 않는 식구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는, 재난을 주는 위로자가 아니라 입술의 위로로 근심을 풀어 주는 공동체가 되기를 구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사별과 질병으로 애통하는 이웃들이 참된 위로를 만나고, 열방에서 복음을 위해 가족을 떠나 보낸 선교사들이 하늘의 증인을 바라보며 서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날을 정하시고 달 수를 손에 들고 계신 영원하신 하나님, 오늘 말씀 앞에 나아왔습니다. 꽃처럼 피었다 지는 우리를 눈여겨보시고 이름으로 불러 주시는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찍힌 나무에서 새순을 돋게 하시는 주님께서 꺾인 우리 마음에도 새 생명을 일으키실 것을 믿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는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없는 존재임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허물이 주머니에 봉인되어 남아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피로 지워졌음을 감사드립니다. 그 은혜를 아는 자로서 다른 사람의 허물을 다시 꺼내어 들추지 않도록 우리의 입술을 지켜 주옵소서.

주께서 부르시고 우리가 대답할 그날을 사모합니다. 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겠느냐고 물었던 욥의 질문에 부활하신 아들로 답해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고난의 날 동안 보초를 서듯 자리를 지키며 교대의 시간을 기다리는 믿음을 우리에게도 주옵소서.

하늘에 증인이 계시고 높은 곳에 중보자가 계심을 믿습니다. 사람에게 변호를 얻지 못해 억울한 성도들을 기억하여 주시고, 항상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게 하여 주옵소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오늘 만나는 한 사람의 옆자리에 조용히 앉게 하여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다시 오실 주님, 그날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자들이 먼저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그날까지 날 계수하는 지혜를 품고 깨어 기도하며, 서로의 짐을 나누어 지고 걸어가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짧은 생애가 주님의 손에서 결코 헛되지 않게 쓰이기를 소원합니다.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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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퍼런스

  1.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대한성서공회, 1998. 본문 출처: https://www.bskorea.or.kr
  2. John E. Hartley, The Book of Job,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88. (욥 14:14, 16:19~21 주해)
  3. Matthew Henry, Commentary on the Whole Bible, Vol. 3 (Job to Song of Solomon), 1708–1710;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판 참조. (욥 14:7, 15:17 주해)
  4. John MacArthur, ed., The MacArthur Study Bible, Nashville: Word Publishing, 1997. (욥 14~16장 주)
  5. Henry M. Morris, The Remarkable Record of Job: The Ancient Wisdom, Scientific Accuracy, and Life-Changing Message of an Amazing Book,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8.
  6. John Wesley, Explanatory Notes upon the Old Testament, Bristol: William Pine, 1765. (욥기 주해)
  7. John Wesley, “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 (Sermon 43, 1765), in The Works of John Wesley, Vol. 2, ed. Albert C. Outler, Nashville: Abingdon Press, 1985.
  8. John Wesley, The Journal of the Rev. John Wesley, ed. Nehemiah Curnock, London: Charles H. Kelly, 1909~1916(전 8권). (1738년 5월 24일 올더스게이트 기록)
  9. Richard P. Heitzenrater, Wesley and the People Called Methodists, 2nd ed., Nashville: Abingdon Press, 2013. (웨슬리의 생애와 임종 장면)
  10. David Livingstone, Narrative of an Expedition to the Zambesi and Its Tributaries, London: John Murray, 1865. (제2차 잠베지 탐험과 메리의 죽음)
  11. Horace Waller, ed., The Last Journals of David Livingstone in Central Africa, London: John Murray, 1874.
  12. 이미지 출처(모두 위키미디어 공용에서 내려받아 크기를 줄여 사용함): 겟세마네 올리브 나무 사진, Fallaner, CC BY-SA 4.0 / 윌리엄 블레이크 『욥기 삽화』 도판, 『Life of William Blake』(1880), 퍼블릭 도메인 / 아네모네 코로나리아 사진, Zachi Evenor, CC BY 2.0 / 보리 추수 사진(1919), 미국 식민지 사진부, 미국 의회도서관, 퍼블릭 도메인 / 히스기야 봉니 사진, Tamir Zegman, 이스라엘 박물관, CC BY-SA 4.0 / 와디 무지브 협곡 사진, Berthold Werner, CC BY 3.0 / 중동 모래먼지 위성 사진, NASA MODIS, 퍼블릭 도메인 / 아르논 협곡 일몰 사진(1919), 미국 식민지 사진부, 미국 의회도서관, 퍼블릭 도메인 / 조지 롬니의 존 웨슬리 초상, 퍼블릭 도메인 / 웨슬리 채플 사진, Dr Neil Clifton, CC BY-SA 2.0 / 토머스 애넌의 데이비드 리빙스턴 사진, 퍼블릭 도메인 / 메리 모펏 리빙스턴 사진, 퍼블릭 도메인 / 메리 리빙스턴 무덤 사진, 말라위 역사과학협회, CC BY-SA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