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차 (욥기 10장 ~ 욥기 13장)
네게브 산지 와디 로츠의 들나귀 떼, Gideon Pisanty 촬영, CC BY 3.0
본문
욥기 10장
-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
-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추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
- 주께도 육신의 눈이 있나이까 주께서 사람처럼 보시나이까
- 주의 날이 어찌 사람의 날과 같으며 주의 해가 어찌 인생의 해와 같기로
- 나의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들추어내시나이까
-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 없나이다
- 주의 손으로 나를 빚으셨으며 만드셨는데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
-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
- 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젖처럼 엉기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 피부와 살을 내게 입히시며 뼈와 힘줄로 나를 엮으시고
-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나를 보살피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 그러한데 주께서 이것들을 마음에 품으셨나이다 이 뜻이 주께 있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 내가 범죄하면 주께서 나를 죄인으로 인정하시고 내 죄악을 사하지 아니하시나이다
- 내가 악하면 화가 있을 것이오며 내가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는 것은 내 속에 부끄러움이 가득하고 내 환난을 내 눈이 보기 때문이니이다
- 내가 머리를 높이 들면 주께서 젊은 사자처럼 나를 사냥하시며 내게 주의 놀라움을 다시 나타내시나이다
- 주께서 자주자주 증거하는 자를 바꾸어 나를 치시며 나를 향하여 진노를 더하시니 군대가 번갈아서 치는 것 같으니이다
- 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찌함이니이까 그렇지 아니하셨더라면 내가 기운이 끊어져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였을 것이라
- 있어도 없던 것 같이 되어서 태에서 바로 무덤으로 옮겨졌으리이다
- 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 그런즉 그치시고 나를 버려두사 잠시나마 평안하게 하시되
-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하옵소서
- 땅은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
욥기 11장
-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이르되
-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말이 많은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
- 네 자랑하는 말이 어떻게 사람으로 잠잠하게 하겠으며 네가 비웃으면 어찌 너를 부끄럽게 할 사람이 없겠느냐
- 네 말에 의하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께서 보시기에 깨끗하다 하는구나
- 하나님은 말씀을 내시며 너를 향하여 입을 여시고
- 지혜의 오묘함으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너의 죄를 잊게 하여 주셨음을 알라
-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 재판을 여시면 누가 능히 막을소냐
-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하지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
-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의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
-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
-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하게 하라
- 그리하면 네가 반드시 흠 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 굳게 서서 두려움이 없으리니
- 곧 네 환난을 잊을 것이라 네가 기억할지라도 물이 흘러감 같을 것이며
- 네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으리니 어둠이 있다 할지라도 아침과 같이 될 것이요
- 네가 희망이 있으므로 안전할 것이며 두루 살펴보고 평안히 쉬리라
- 네가 누워도 두렵게 할 자가 없겠고 많은 사람이 네게 은혜를 구하리라
- 그러나 악한 자들은 눈이 어두워서 도망할 곳을 찾지 못하리니 그들의 희망은 숨을 거두는 것이니라
욥기 12장
-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 너희만 참으로 백성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
- 나도 너희 같이 생각이 있어 너희만 못하지 아니하니 그같은 일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 하나님께 불러 아뢰어 들으심을 입은 내가 이웃에게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의롭고 온전한 자가 조롱거리가 되었구나
- 평안한 자의 마음은 재앙을 멸시하나 재앙이 실족하는 자를 기다리는구나
-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자는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의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
-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말하리라
- 땅에게 말하라 네게 가르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
-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
-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 입이 음식의 맛을 구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간하지 아니하느냐
-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
-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계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
- 그가 헐으신즉 다시 세울 수 없고 사람을 가두신즉 놓아주지 못하느니라
- 그가 물을 막으신즉 곧 마르고 물을 보내신즉 곧 땅을 뒤집나니
- 능력과 지혜가 그에게 있고 속은 자와 속이는 자가 다 그에게 속하였으므로
- 모사를 벌거벗겨 끌어 가시며 재판장을 어리석은 자가 되게 하시며
- 왕들이 맨 것을 풀어 그들의 허리를 동이시며
- 제사장들을 벌거벗겨 끌어 가시고 권력이 있는 자를 넘어뜨리시며
- 충성된 사람들의 말을 물리치시며 늙은 자들의 판단을 빼앗으시며
- 귀인들에게 멸시를 쏟으시며 강한 자의 띠를 푸시며
- 어두운 가운데에서 은밀한 것을 드러내시며 죽음의 그늘을 광명한 데로 나오게 하시며
- 민족들을 커지게도 하시고 다시 멸하기도 하시며 민족들을 널리 퍼지게도 하시고 다시 끌려가게도 하시며
- 만민의 우두머리들의 총명을 빼앗으시고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에서 방황하게 하시며
- 빛 없이 캄캄한 데를 더듬게 하시며 취한 사람 같이 비틀거리게 하시느니라
욥기 13장
-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깨달았느니라
-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하지 않으니라
-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 없는 의원이니라
- 너희가 참으로 잠잠하면 그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
- 너희는 나의 변론을 들으며 내 입술의 변명을 들어 보라
-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불의를 말하려느냐 그를 위하여 속임을 말하려느냐
- 너희가 하나님의 낯을 따르려느냐 그를 위하여 변론하려느냐
- 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 너희가 사람을 속임 같이 그를 속이려느냐
- 만일 너희가 몰래 낯을 따를진대 그가 반드시 책망하시리니
- 그의 존귀가 너희를 두렵게 하지 않겠으며 그의 두려움이 너희 위에 임하지 않겠느냐
- 너희의 격언은 재 같은 속담이요 너희가 방어하는 것은 토성이니라
- 너희는 잠잠하고 나를 버려두어 말하게 하라 무슨 일이 닥치든지 내가 당하리라
-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 경건하지 않은 자는 그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
- 너희들은 내 말을 분명히 들으라 내가 너희 귀에 알려 줄 것이 있느니라
- 보라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내가 정의롭다 함을 얻을 줄 아노라
- 나와 변론할 자가 누구이랴 그러면 내가 잠잠하고 기운이 끊어지리라
- 오직 내게 이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마옵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얼굴을 피하여 숨지 아니하오리니
-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시오며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마실 것이니이다
-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내가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
- 나의 죄악이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주의 원수로 여기시나이까
- 주께서 어찌하여 날리는 낙엽을 놀라게 하시며 마른 검불을 뒤쫓으시나이까
-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내가 젊었을 때에 지은 죄를 내가 받게 하시오며
-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며 나의 모든 길을 살피사 내 발자취를 점검하시나이다
- 나는 썩은 물건의 낡아짐 같으며 좀 먹은 의복 같으니이다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본문 해설
변론의 한복판: 욥기 10~13장
오늘은 연대기 일독의 여섯째 날입니다. 어제 우리는 욥이 엘리바스와 빌닷의 훈계에 맞서 괴로움의 무게를 저울에 달아 보라고 호소하던 장면을 보았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를 찾던 그의 외침도 함께 들었습니다. 오늘 읽는 네 장은 그 변론이 더 깊은 자리로 내려가는 대목입니다. 욥이 이번에는 친구들을 제쳐 두고 하나님께 직접 아뢰고, 셋째 친구 소발이 처음으로 입을 열며, 욥이 다시 맞서는 흐름을 함께 따라가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흐름을 먼저 머리에 담아 두면 길을 잃지 않습니다. 10장은 앞 장에서 이어지는 욥의 기도와 항변이고, 11장은 소발의 첫 번째 발언이며, 12~13장은 그에 대한 욥의 긴 반론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 본문은 변론 첫 번째 순환의 마지막 구간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세 친구는 서로 어떻게 달랐을까요? 엘리바스는 한밤의 환상과 자기 경험을 근거로 말했고, 빌닷은 조상들이 물려준 전통을 근거로 말했으며, 소발은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광대한지를 근거로 몰아붙입니다. 세 사람의 말씨는 서로 달랐으나 결론은 하나였습니다. 네가 숨긴 죄 때문에 이 일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미리 짚어 두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욥의 거친 말이 여러 번 나오는데, 그 말을 그대로 따라 하라고 성경이 기록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무오는 기록된 모든 발언이 옳다는 뜻이 아니라 그 발언이 실제로 그렇게 오갔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전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무엇을 본받고 무엇을 분별할지 배우게 됩니다.
족장 시대의 법정과 세 친구의 고향
욥기에는 재판과 관련된 낱말이 유난히 많이 등장합니다. 변론, 정죄, 심판, 진술, 담보, 판결자 같은 말이 쉬지 않고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10장 2절의 “변론하시는지"로 시작해 13장 18절의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로 이어지며 법정 장면을 닮은 긴 논쟁을 펼쳐 놓습니다.

고대 근동의 성문 앞 광장은 재판이 열리는 자리였습니다. 장로들이 앉고 당사자가 서서 자기 사정을 말하면, 증인이 나오고 중재자가 양쪽을 조정했습니다. 욥은 그 익숙한 풍경을 그대로 가져와 하나님을 상대로 재판을 청구하는 상상을 펼치고 있는 셈입니다. 이 점을 알고 읽으면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13:22) 같은 구절의 긴장이 훨씬 또렷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새로 등장하는 소발의 출신지 “나아마"는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는 곳입니다. 다만 데만과 수아처럼 에돔에서 아라비아 북서부에 이르는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집니다. 여호수아 15장 41절에 나오는 유다 평지의 나아마와는 다른 곳으로 이해됩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 네 사람이 모두 이스라엘 밖의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율법도 성막도 제사장 제도도 없던 시대에, 홍수 이후 노아의 후손에게 전해진 창조주에 관한 지식을 붙들고 그분을 경외하며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서기 전인 족장 시대에 이런 신앙이 이미 살아 있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창조과학자이자 구약 연구가였던 헨리 모리스는 『욥기의 놀라운 기록』에서 욥기를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책으로 보았고, 그 안에 창조와 홍수에 관한 기억이 짙게 남아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지으셨다는 창세기 2장의 기억이 그대로 되살아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욥기 10장: 토기장이의 손 앞에서
10장은 9장의 탄식을 그대로 이어받습니다.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10:1). 여기서 “곤비하다"로 옮긴 말은 삶 자체가 지겨워질 만큼 지쳐 버린 상태를 가리킵니다. 욥은 감정을 정리해서 말하지 않고, 괴로운 마음이 흘러나오는 대로 쏟아 놓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어지는 2절의 요청이 오늘 본문의 열쇠입니다.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 욥이 구한 것은 고통의 제거가 아니라 고통의 이유였습니다. 사람은 아픔 자체보다 까닭을 알 수 없는 아픔 앞에서 더 쉽게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3절에서 욥은 뼈아픈 질문을 던집니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고 멸시하시며, 오히려 악인의 꾀에는 빛을 비추시는 것이 선해 보이시느냐는 물음입니다. 혹시 이런 질문이 지나치게 불경하게 들리시나요? 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지막에 세 친구를 책망하시면서도 욥을 “내 종"이라 부르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욥 42:7).
4~7절에서 욥은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를 짚습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세월이 짧기에 서둘러 조사하지만, 하나님께는 육신의 눈도 없고 날수의 제한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죄를 캐내려고 급히 서두르실 까닭이 없다는 항변입니다. 7절의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라는 고백은 욥의 양심이 하나님 앞에서 깨끗했다는 선언으로 들립니다.
태에서 지으신 분을 향한 호소
8~12절은 오늘 본문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목입니다. 욥은 자기 몸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하나하나 되짚습니다. 주의 손으로 빚으셨고, 흙을 뭉치듯 지으셨고, 젖처럼 엉기게 하셨고, 피부와 살을 입히시며 뼈와 힘줄로 엮으셨다는 것입니다. 생명과 은혜를 주시고 보살피심으로 그 영을 지켜 주셨다고도 고백합니다.

9절의 “흙을 뭉치듯"이라는 표현을 조금 더 들여다보겠습니다. 히브리어로 토기장이가 진흙을 손으로 주물러 모양을 잡는 동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창세기 2장 7절에서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코에 불어넣으신 그 장면이 욥의 입에서 그대로 되살아난 셈입니다. 욥은 사람을 우연의 산물로 알지 않았고, 손수 빚으신 작품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분명히 해 둘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오랜 세월에 걸쳐 다른 생물에서 서서히 변해 왔다고 가르치는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섯째 날에 흙으로 직접 아담을 지으시고 그 갈빗대로 하와를 만드셨다고 가르칩니다(창 2:7, 21~22). 진화론은 물론이고, 창조의 과정에 진화를 끼워 넣는 유신 진화론도 이 본문과 나란히 설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태 속의 생명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시편 139편 13~16절은 하나님이 모태에서 사람을 조직하셨고 그 형체가 이루어지기 전부터 보셨다고 노래합니다. 욥의 고백도 같은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이 진리는 오늘날 생명의 시작을 가볍게 여기는 시대 속에서 태아의 생명도 하나님이 손수 빚으신 생명임을 조용히 증언해 줍니다.
13~17절에서 욥의 목소리는 다시 어두워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보시는 것이 젊은 사자가 먹이를 노리는 시선처럼 느껴진다고 호소합니다. 고통이 길어지면 같은 사랑의 손길도 무섭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욥은 지금 하나님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하나님을 가장 아프게 오해하는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
18~22절에서 욥은 다시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고 말합니다. “태에서 바로 무덤으로 옮겨졌으리이다”(10:19)라는 말은 차라리 세상의 빛을 보지 않았더라면 이 아픔도 없었으리라는 한탄입니다. 그러면서 잠시만이라도 숨 돌릴 틈을 달라고 구합니다.
21~22절이 그리는 저 세상의 모습은 유난히 캄캄합니다. 돌아오지 못할 땅,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조차 흑암 같은 땅입니다. 이 묘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부활의 빛이 아직 환하게 비치지 않은 시대의 사람이 죽음을 바라본 느낌이라고 보는 편이 옳겠습니다.

고대 근동 사람들은 바위를 깎아 무덤을 만들고 그 안에 가족을 함께 안치했습니다. 위의 사진처럼 좁고 어두운 암굴 무덤 안에 들어가 보면, 욥의 묘사가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을 몸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죽음은 그에게 빛이 완전히 사라진 방과 같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 어둠을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다고 선포합니다(딤후 1:10). 욥이 더듬던 캄캄한 방에 창문이 열린 셈입니다. 그래서 같은 죽음 앞에서도 신자는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빌 1:23).
욥기 11장: 소발의 정통과 그 칼날
이제 셋째 친구 소발이 입을 엽니다. 그의 첫마디는 매섭습니다.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말이 많은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11:2). 욥의 긴 탄식을 말재주에서 나온 수다로 깎아내린 것입니다. 세 친구 가운데 소발이 가장 거칠었다고 보는 주석가들이 많습니다.
소발은 욥이 하지 않은 말까지 끌어다 붙입니다. 4절에서 그는 욥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께서 보시기에 깨끗하다"고 주장했다고 몰아세우는데, 욥은 그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욥은 이 고난이 자기 죄의 대가가 아니라고 했을 뿐이지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주장한 적이 없었습니다. 9장 2절에서 인생이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없다고 먼저 인정한 사람이 바로 욥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발은 왜 이런 말을 만들어 붙였을까요? 상대의 말을 가장 극단적으로 해석해 놓고 그것을 공격하는 일이 더 쉬웠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이 종종 벌어집니다. 형제의 말을 가장 나쁘게 들어 놓고 그 허수아비와 싸우는 모습이 참으로 흔한 법입니다.
5~6절에서 소발은 하나님이 직접 입을 열어 지혜의 오묘함을 보여 주시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소원은 뒤에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38장에서 폭풍우 가운데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그때 책망을 들은 쪽은 욥이 아니라 소발과 그 친구들이었습니다.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오묘함
7~12절은 소발의 발언 중에서 가장 널리 사랑받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의 오묘함을 사람이 어찌 측량하겠느냐고 물으며, 그 크심이 하늘보다 높고 스올보다 깊으며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다고 노래합니다. 네 방향을 모두 들어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그려 낸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소발의 이 말은 틀렸을까요? 조금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찬양했습니다(롬 11:33).
문제는 옳은 교리를 틀린 자리에 놓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음은 본래 우리가 남의 고난을 가볍게 판단하지 못하게 하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소발은 같은 진리를 “그러니 네가 하나님 앞에서 입을 다물고 죄를 인정하라"는 압박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겸손을 가르쳐야 할 교리를 몽둥이로 쓴 셈입니다.

12절의 “들나귀 새끼"라는 비유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광야의 들나귀는 길들여지지 않는 짐승의 대표였고, 소발은 지각 없는 사람이 태어나는 모습이 그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글 맨 위의 사진이 바로 네게브 산지를 달리는 들나귀 떼인데, 욥기 39장 5~8절에서는 하나님이 그 들나귀를 자유롭게 놓아 주신 분이 바로 자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멸시의 비유로 쓴 짐승조차 하나님께는 손수 지으신 피조물이었던 것입니다.
회개하면 회복된다는 공식의 함정
13~20절에서 소발은 처방을 내놓습니다. 마음을 바로 정하고 손을 들어 기도하며, 손에 있는 죄악을 멀리 버리고 불의를 장막에서 치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흠 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 환난은 흘러간 물처럼 잊히며,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아진다고 약속합니다.
이 권면이 참 아름답게 들리지 않나요? 실제로 이 말들만 떼어 놓으면 훌륭한 설교가 됩니다.
그런데 어디가 잘못된 것일까요? 욥에게는 버려야 할 숨은 죄악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1장 8절에서 하나님이 친히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한 자가 세상에 없다고 증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소발의 처방은 회개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복음이지만 이미 정직하게 걷고 있는 사람에게는 고문이 됩니다. 욥은 숨긴 죄를 찾으려고 자기 삶을 몇 번이고 되짚었을 것입니다. 찾아도 없는 죄를 찾으라는 요구만큼 사람을 지치게 하는 일은 드문 법입니다.
더 나아가 소발의 공식은 성경 전체와도 어긋납니다. 예수님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두고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요 9:3).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그리스도를 믿는 일만이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가르쳤습니다(빌 1:29). 고난과 죄를 일대일로 묶는 계산식은 주님이 친히 깨뜨리신 틀입니다.
매튜 헨리는 이 대목의 주해에서, 소발이 욥에게 권한 회개 자체는 좋은 것이지만 그 권면이 잘못된 전제 위에 서 있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 손을 드는 일은 누구에게나 마땅한 일입니다. 다만 그것이 고난의 원인을 상대에게 돌리는 방식으로 제시될 때 권면은 더 이상 권면이 아니게 됩니다.
우리도 비슷한 실수를 자주 저지릅니다.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말씀을 더 읽으세요”, “기도를 더 하세요” 하고 권할 때, 그 권면이 사랑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원인을 그 사람에게 돌려 놓고 마음 편해지려는 것인지 가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같은 말이 약이 되기도 하고 칼이 되기도 하는 법입니다.
20절에서 소발은 악한 자들의 희망이 숨을 거두는 것뿐이라며 말을 맺습니다. 욥의 귀에 이 말이 어떻게 들렸을까요? 자기를 그 악한 자의 자리에 놓고 하는 선고로 들렸을 것입니다. 진리를 말할 때 듣는 사람의 자리를 헤아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기서 배우게 됩니다.
욥기 12장: 짐승에게 물어 보라
12장에서 욥은 세 친구를 한꺼번에 상대합니다. 첫마디에 서늘한 풍자가 담겨 있습니다. “너희만 참으로 백성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12:2). 지혜가 너희와 함께 묻힐 것처럼 말한다는 비꼼입니다. 욥도 아는 내용을 마치 처음 듣는 사람 취급하는 태도에 대한 반박인 것입니다.
4절은 가슴을 찌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 들으심을 입던 사람이 이제 이웃의 웃음거리가 되었고, 의롭고 온전한 자가 조롱거리가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5절에서 그는 한 문장으로 세상의 인심을 정리합니다. “평안한 자의 마음은 재앙을 멸시하나.” 평안한 사람은 남의 재앙을 쉽게 평가한다는 뜻입니다.
6절은 더 나아가 강도의 장막이 형통하다고 말합니다. 소발의 공식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관찰입니다.
그렇다면 욥이 세상에 정의가 없다고 결론 내린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현실을 정직하게 보고하며 친구들의 공식이 현실과 맞지 않음을 지적했을 뿐입니다. 시편 73편의 아삽도 같은 고민을 통과했습니다.

7~10절은 오늘 본문의 보석 같은 구절입니다.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말하리라.” 욥은 짐승과 새와 땅과 바다의 고기가 모두 창조주를 증언한다고 말합니다. 조상의 전통을 들이대는 빌닷에게, 그리고 지혜를 독점한 듯 말하는 소발에게 피조물 전체를 증인석에 세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학에서 자연계시라고 부르는 진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라고 선포했습니다(롬 1:20). 하늘의 별과 들의 꽃과 몸속 세포 하나까지가 설계자가 계신다는 증거인 셈입니다. 그래서 창조 세계를 정직하게 관찰하는 일은 신앙의 적이 아니라 신앙의 벗입니다.
10절은 그 증언을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숨 쉬는 모든 것의 호흡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선언입니다. 욥은 자기를 치시는 분이 동시에 자기 숨을 붙들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왕과 제사장을 벌거벗기시는 주권
13~25절은 하나님의 주권을 노래하는 긴 찬가입니다. 욥은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한 뒤, 그 주권이 사람의 세상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하나씩 열거합니다. 모사와 재판장, 왕과 제사장, 귀인과 강한 자와 늙은 자가 차례로 등장합니다.
이 명단을 가만히 보시면 한 가지 공통점이 보입니다. 모두 그 사회에서 가장 높고 지혜롭다고 여겨지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총명을 빼앗으시고, 띠를 풀어 버리시며, 벌거벗겨 끌어가기도 하십니다.
욥의 요점은 분명합니다. 사람의 지혜와 권력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담보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발이 내세운 지혜의 광대하심은 욥을 누르는 무기가 될 수 없고, 오히려 세 친구 자신을 낮추어야 할 이유가 되는 셈입니다.

22절은 특별히 기억할 만합니다. “어두운 가운데에서 은밀한 것을 드러내시며 죽음의 그늘을 광명한 데로 나오게 하시며.” 욥은 10장에서 죽음의 그늘진 땅을 두려워하던 사람인데, 여기서는 그 그늘조차 빛으로 끌어내시는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자기 입으로 소망의 씨앗을 뿌려 놓은 셈입니다.
23절에서 그는 민족의 흥망까지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말합니다. 민족을 커지게도 하시고 멸하기도 하시며, 널리 퍼지게도 하시고 끌려가게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1장에서 바벨에서 언어를 흩으시고 민족을 갈라놓으신 사건을 우리는 이미 읽었습니다. 욥은 율법이 주어지기 훨씬 전인 족장 시대 사람이면서도 역사의 주인이 누구신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욥기 13장: 쓸모 없는 의원들을 향한 항변
13장에서 욥은 친구들에게 날카로운 이름을 붙입니다.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 없는 의원이니라”(13:4). 의원, 곧 의사라는 말이 뼈아픕니다. 그들은 환자를 고치러 와서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5절의 권면은 모든 위로자가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너희가 참으로 잠잠하면 그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 침묵이 지혜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세 친구가 가장 잘했던 순간은 이레 동안 말없이 곁에 앉아 있던 때였습니다(욥 2:13).
7~12절에서 욥은 뜻밖의 각도로 공격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변호한다면서 불의를 말하고 속임을 말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하나님의 편을 들려고 사실을 비틀어 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고 되묻습니다.
이 대목은 참으로 서늘합니다. 혹시 하나님을 변호한다는 이유로 사람을 상하게 한 적은 없는지 돌아보게 되지 않나요? 욥의 말대로라면 하나님은 그런 변호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42장 7절에서 하나님이 세 친구를 향해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하다고 책망하신 장면이 이 지적의 정확함을 증명해 줍니다.
12절의 비유도 재미있습니다. 욥은 친구들의 격언을 재 같은 속담이라 부르고, 그들이 쌓아 올린 논리를 토성에 빗댑니다. 토성은 돌이 아니라 진흙으로 쌓아 올려 오래 버티지 못하는 방어벽을 가리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흙으로 쌓은 것은 결국 무너진다는 뜻입니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13장 15절
13장 15절은 욥기 전체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개역개정은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로 옮기고, 각주에는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니라는 다른 번역을 함께 실어 두었습니다.
두 번역 가운데 어느 쪽이 맞을까요? 히브리어 본문의 한 낱말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갈리는데, 어느 쪽으로 읽어도 결론은 같습니다. 욥은 죽음을 각오하고도 하나님 앞에서 입을 열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겠다는 결단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욥의 믿음이 빛나는 자리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오해했고, 때로 틀린 말도 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하나님을 떠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욕하고 등을 돌리게 되리라고 장담했지만(욥 2:5), 욥은 매를 맞으면서도 그 손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16절에서 욥은 “경건하지 않은 자는 그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고 말합니다. 쉽게 풀어 보면, 위선자라면 애초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 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지금 하나님께 나아가려 애쓰는 그 마음 자체가 자기 진심의 증거라는 고백입니다.
18절의 “내가 정의롭다 함을 얻을 줄 아노라"는 말은 자기 공로를 자랑하는 말이 아닙니다. 재판이 제대로 열리기만 하면 이 고난이 죄의 대가가 아님이 드러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42장에서 실제로 그 확신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차꼬와 좀 먹은 의복: 고난의 밤에서 그날까지
20절부터 욥은 다시 하나님께 돌아섭니다. 두 가지만 하지 말아 달라고 청합니다. 주의 손을 자기에게 대지 마시고, 주의 위엄으로 두렵게 하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만 멈춰 주시면 얼굴을 피하지 않고 나아가 대답하겠다고 말합니다.
23절의 기도는 참으로 간절합니다. “나의 죄악이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친구들에게는 숨은 죄가 없다고 맞섰던 사람이, 하나님께는 있다면 알려 주십시오 하고 엎드립니다. 사람 앞에서의 정직과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 한 사람 안에 함께 있는 모습입니다.

27절의 “차꼬"는 발을 끼워 고정하는 나무 형틀을 가리킵니다. 죄수를 묶어 두어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도구였습니다. 욥은 병든 몸 때문에 꼼짝 못 하는 자기 처지를 그렇게 표현했고, 그러면서 하나님이 자기 발자취를 하나하나 점검하신다고 호소합니다.
28절의 마지막 비유는 쓸쓸하기 그지없습니다. “나는 썩은 물건의 낡아짐 같으며 좀 먹은 의복 같으니이다”(13:28). 위 사진의 고대 아마포처럼, 옷은 세월이 지나면 좀이 먹고 삭아 부스러집니다. 욥은 자기 몸이 그렇게 삭아 가고 있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쓸쓸한 결말이 끝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좀도 먹지 않고 녹도 슬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가르치셨고(마 6:20), 사도 바울은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게 될 날을 약속했습니다(고전 15:53). 좀 먹은 의복 같던 육신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과 같은 형체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빌 3:21).
하나님의 경륜은 이 소망을 향해 흘러갑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면 그분은 천 년 동안 이 땅을 다스리실 것이고(계 20:4~6), 그 후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아픔도 눈물도 다시 없을 것입니다(계 21:4). 욥이 차꼬에 채인 발로 더듬던 그날이 우리에게는 이름까지 알려진 분명한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품고 오늘 하루를 걸어가 봅시다.
묵상과 적용
오늘 본문에서 가장 먼저 붙들고 싶은 것은 욥이 고통의 이유를 하나님께 물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친구들에게 설명을 요구하다 지친 끝에, 결국 하나님께로 질문을 옮겼습니다. 묻는 자리를 바꾼 것이 욥의 가장 중요한 선택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요즘 누구에게 질문을 쏟고 계신가요? 사람에게만 묻다 보면 답은 늘 모자라고 마음은 더 상하기 마련입니다. 오늘 하루 중 십 분이라도 하나님께 직접 아뢰는 시간을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정리된 문장이 아니어도 괜찮고, “무슨 까닭입니까” 하는 한 마디여도 충분합니다.
둘째로, 10장 8~12절의 고백을 우리 것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욥은 고통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손수 빚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했습니다. 이것은 감정이 아니라 기억이었습니다. 어두운 날에 우리를 붙들어 주는 것도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에 관한 진실입니다.
이 기억은 아주 실천적인 힘을 냅니다.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이 미워질 때, 병든 몸이 짐처럼 느껴질 때, 능력이 남보다 못하다고 주저앉고 싶을 때 내 몸과 영혼을 지으신 분이 계신다는 사실을 소리 내어 고백해 보십시오. 자녀를 키우는 부모라면 아이에게도 이 진리를 자주 들려주어야 하는 법입니다. 아이의 가치는 성적이나 겉모습에서 오지 않고 창조주의 손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어릴 때부터 알려 주는 일이 평생의 자산이 됩니다.
셋째로, 소발의 자리를 경계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가 말한 교리는 옳았으나 그 교리를 사람에게 쓰는 방식이 틀렸습니다. 우리도 성경 지식이 자라날수록 그 지식으로 사람을 재단하려는 유혹을 함께 받습니다. 지식이 많아질수록 더 조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 점검해 볼 것이 있습니다. 어떤 성도의 병이나 실패를 두고 “기도가 부족했다”, “숨은 죄가 있을 것"이라고 속단한 적은 없는지 돌아보십시오. 상대가 하지 않은 말을 과장해 비판한 적은 없는지도 살펴보셔야 합니다. 이번 주에 누군가의 말이 거슬릴 때는 가장 좋은 뜻으로 한 번 더 들어 보기로 작정해 보시면 어떨까요?
넷째로, 12장 7절의 초청을 받아들여 봅시다. 욥은 짐승과 새와 땅과 바다에게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창조 세계는 창조주를 가리키는 가장 큰 설교집인 셈입니다. 이번 주말에 가족과 함께 산책을 나가 나무와 새와 하늘을 보며 “이것을 누가 지으셨을까” 하고 이야기를 나누어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어 둘 것이 있습니다. 세상은 자연을 설명할 때 우연과 긴 세월을 앞세우지만, 성경은 창조주의 말씀과 손을 앞세웁니다. 우리는 창세기 1장이 말하는 대로 엿새 동안의 창조와 아담의 역사성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을 깊이 살펴보는 일은 신앙을 흔들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더 크게 보게 해 줍니다.
다섯째로, 13장 15절의 결단을 오늘의 결단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욥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아뢰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숙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감정이 좋을 때만 기도하는 믿음은 아직 어린 믿음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 안에서 일하시고 우리는 그 은혜에 순종으로 응답합니다. 칭의의 은혜가 우리를 아들로 세워 주었기에, 우리는 어두운 날에도 아버지의 방문을 두드릴 권리를 가진 자녀입니다. 그 권리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기도가 나오지 않는 날에도 자리에 앉아 침묵으로 머무는 것부터 시작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여섯째로, 13장 23절의 기도를 날마다 드려 봅시다. 욥은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하고 아뢰었습니다. 사람 앞에서는 억울함을 분명히 말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모르는 죄가 있다면 보여 주십시오 하고 엎드린 것입니다.
이 기도는 자기를 괴롭히는 기도가 아닙니다. 죄를 억지로 찾아내 자책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성령께서 비추시는 빛에 자기를 내어 놓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39편 23~24절의 다윗도 같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늘 저녁 잠들기 전에 이 한 문장을 소리 내어 아뢰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모든 길의 끝에는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욥이 구하던 재판은 결국 십자가에서 열렸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우리 자리에 서서 정죄를 받으셨기에, 이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선언이 주어졌습니다(롬 8:1). 욥이 그토록 듣고 싶었던 무죄 판결을, 우리는 복음 안에서 이미 듣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고난당하는 이웃을 생각해 봅시다. 욥이 친구들에게 바란 것은 설명이 아니라 동정이었습니다. 이번 주에 병원에 있는 성도에게 전화를 걸고, 실직한 이웃과 밥을 먹고, 자녀를 잃은 가정 곁에 조용히 앉아 보시기 바랍니다. 말을 줄이고 함께 있어 주는 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내미는 숙제입니다.
예화
주기철 목사: 일사각오의 신앙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이 고백을 삶으로 살아 낸 한국 교회의 증인이 있습니다. 주기철 목사입니다. 1897년 11월 25일 경남 창원 진해에서 태어난 그는 1926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초량교회와 마산 문창교회를 거쳤습니다.

1935년 12월, 평양신학교 사경회의 마지막 집회에서 그는 요한복음 11장 16절을 본문으로 설교했습니다. 제목은 「일사각오」, 곧 한 번 죽기를 각오한다는 뜻입니다. 그는 세 가지 각오를 말했는데, 예수를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이웃을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부활의 진리를 위해 죽기를 각오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설교가 자신의 생애를 미리 그려 놓은 지도가 될 줄은 본인도 몰랐을 것입니다.
이듬해인 1936년, 그는 평양 산정현교회의 초빙을 받아 부임했습니다. 그 무렵 일제는 조선의 교회와 학교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합니다. 전국의 신학교와 교단이 하나씩 무릎을 꺾는 가운데,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가 제1계명과 제2계명을 정면으로 어기는 우상숭배라며 거부했습니다.

1938년의 첫 검속을 시작으로 그는 여러 차례 끌려가는 길을 걷습니다. 경찰서와 형무소를 오가며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교회는 폐쇄되고 목사직은 박탈되었으며 가족은 사택에서 쫓겨났습니다. 고문으로 몸이 부서져 가는데도 그는 배교의 서명 한 줄을 남기지 않습니다. 1944년 4월 21일 밤, 그는 마흔일곱 해의 생을 평양형무소에서 마쳤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주기철 목사의 고난은 죄의 대가가 아니라 신실함의 대가였다는 사실입니다. 소발의 공식대로라면 그는 가장 큰 죄인이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장 충성된 종을 가장 어두운 감방에 두셨고, 그 어둠에서 한국 교회를 깨우는 빛을 꺼내셨습니다.
그가 옥중에서 어머니와 성도들에게 전했다고 알려진 다섯 가지 기도 가운데 첫째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달라는 간구입니다. 욥이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하면서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듯, 주기철 목사도 죽음을 앞에 두고 더 깊이 하나님께로 들어갔습니다. 고난의 밤에 믿음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이보다 또렷하게 보여 주는 장면은 흔하지 않습니다.
조지 뮐러: 구하지 않고 기도한 사람
12장 10절은 모든 생명의 호흡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선언합니다. 이 한 구절을 평생의 실험으로 증명한 사람이 조지 뮐러입니다. 1805년 프로이센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 날 도박과 거짓으로 가득한 생활을 하다가 회심한 뒤, 영국 브리스틀에서 목회와 고아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1836년 4월 11일, 뮐러 부부는 브리스틀 윌슨가 6번지의 자기 집을 손질해 여자아이 서른 명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했습니다. 그해 5월 18일에 그 집에서 지내던 아이는 이미 스물여섯 명입니다. 사역이 커지면서 그는 애슐리 다운에 큰 건물을 세워 갔는데, 1849년부터 1870년 사이에 지어진 다섯 채의 건물은 한 번에 2,050명의 아이를 돌볼 수 있는 규모였습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그가 단 한 번도 사람에게 돈을 요청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모금 편지도 보내지 않았고, 설교 끝에 헌금을 호소하지도 않았습니다. 필요를 오직 하나님께만 아뢰었고, 들어온 것을 기록으로 남겨 하나님이 응답하신 증거로 공개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이 지금도 기도를 들으시는 분임을 세상에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식탁이 비어 있던 아침에 감사 기도를 드리자 빵과 우유가 채워졌다는 일화도 널리 전해집니다. 뮐러는 이런 응답을 수천 건의 기록으로 남겼고, 그 기록은 『조지 뮐러를 향하신 주의 손길에 관한 이야기』라는 제목의 보고서로 거듭 출판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욥기 12장에 겹쳐 놓으면 의미가 더 깊어집니다. 욥은 모든 생명의 호흡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고백했지만, 그 고백을 가장 어두운 자리에서 했습니다. 뮐러는 같은 진리를 밝은 자리에서 증명해 보인 사람입니다. 두 사람의 자리는 달랐으나 붙든 진리는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뮐러의 생애에도 어두운 밤이 찾아옵니다. 1870년 그는 사십 년을 함께한 아내 메리를 잃었는데, 장례식에서 직접 설교하며 주께서 하신 일이 선하다고 고백했습니다. 자기 슬픔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놓지 않은 모습입니다. 욥처럼 아파하면서도 욥처럼 떠나지 않는 길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어느 쪽에 서 계신가요? 어둠 속의 욥일 수도 있고, 응답을 세어 보는 뮐러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자리에 있든 우리의 호흡을 손에 들고 계신 분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손을 믿고 오늘의 한 걸음을 떼어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
먼저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고통의 이유를 알 수 없을 때 사람에게만 묻다가 지치지 않고 하나님께 직접 아뢰는 자녀가 되기를 구하며, 우리를 손수 빚으신 분이 계신다는 사실을 어두운 날에도 기억하게 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아울러 성경 지식이 자라날 때 그 지식으로 사람을 재단하지 않고 오히려 더 겸손해지도록 지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가정을 위해서는, 자녀에게 창조주의 손길을 자주 들려주는 부모가 되고 서로의 아픔 앞에서 설명보다 동행을 택하는 식구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는, 고난당하는 성도에게 숨은 죄를 캐묻는 교회가 아니라 함께 침묵하며 곁을 지키는 교회가 되기를 구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병과 가난과 외로움으로 오늘 밤을 지새우는 이웃들이 위로를 얻고, 열방에서 신앙 때문에 고난받는 형제자매들이 주기철 목사와 같은 담대함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흙을 뭉치듯 우리를 지으시고 뼈와 힘줄로 엮어 주신 창조주 하나님, 오늘 말씀 앞에 나아왔습니다. 우리의 호흡 하나까지 주의 손에 있음을 고백하며, 생명과 은혜를 주시고 지금까지 보살펴 주신 그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때로 그 손을 사냥꾼의 손처럼 오해하지만, 주님은 변함없이 지키시는 아버지의 손이심을 믿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소발의 자리에 서 있던 우리의 입술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옳은 말씀을 틀린 자리에 놓아 이웃을 아프게 했던 날들이 있었고, 형제가 하지 않은 말을 부풀려 판단했던 날들도 있었습니다. 진리를 사랑 안에서 말하는 지혜를 부어 주시고, 잠잠함이 지혜가 되는 순간을 분별하게 하여 주옵소서.
짐승과 새와 땅과 바다가 주님을 증언하는 세상에 우리를 두신 주님, 눈을 열어 그 증언을 듣게 하여 주옵소서. 엿새 동안 만물을 지으시고 사람을 손수 빚으신 그 창조의 능력을 믿으며, 세상의 어떤 가설도 주님의 말씀을 뒤집을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피조물을 바라볼 때마다 창조주를 더 크게 보게 하여 주옵소서.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주님 앞으로 나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욥이 죽음을 각오하고도 입을 열었던 것처럼, 우리도 어두운 밤에 기도의 자리를 떠나지 않게 붙들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차꼬에 채인 듯 움직일 수 없는 형편에 있는 성도들에게 힘을 주시고, 좀 먹은 의복 같은 이 몸이 장차 주님의 영광의 몸과 같이 변할 날을 바라보게 하여 주옵소서.
다시 오실 주님, 그날에는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이 사라지고 다시는 아픔도 눈물도 없을 것을 믿습니다. 그날까지 깨어 기도하며 이웃의 짐을 나누어 지고 걸어가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만나는 아픈 한 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밀게 하여 주시고, 우리의 침묵과 동행이 주님의 위로를 전하는 통로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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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퍼런스
-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대한성서공회, 1998. 본문 출처: https://www.bskorea.or.kr
- Henry M. Morris, The Remarkable Record of Job: The Ancient Wisdom, Scientific Accuracy, and Life-Changing Message of an Amazing Book,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8.
- John E. Hartley, The Book of Job,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88. (욥 10~13장 주해)
- Matthew Henry, Commentary on the Whole Bible, Vol. 3 (Job to Song of Solomon), 1708–1710;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판 참조. (욥 11:13, 13:15 주해)
- John MacArthur, ed., The MacArthur Study Bible, Nashville: Word Publishing, 1997. (욥기 서론 및 욥 11~13장 주)
- C. I. Scofield, ed., The Scofield Reference Bibl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09. (창 11:9, 12:1 주)
- Gleason L. Archer Jr., A Survey of Old Testament Introduction, rev. ed., Chicago: Moody Publishers, 1994. (욥기의 연대와 배경)
- John Wesley, “On Working Out Our Own Salvation” (Sermon 85, 1785), in The Works of John Wesley, Vol. 3, ed. Albert C. Outler, Nashville: Abingdon Press, 1986.
- John Wesley, Explanatory Notes upon the Old Testament, Bristol: William Pine, 1765. (욥기 주해)
- 이상규,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주기철 목사의 참배 거부와 순교」, 국민일보 연재, 2018. (주기철 목사의 생애와 「일사각오」 설교)
- George Müller, A Narrative of Some of the Lord’s Dealings with George Müller, London: J. Nisbet, 1837~1886(전 5권). (브리스틀 고아 사역의 기록)
- A. T. Pierson, George Müller of Bristol and His Witness to a Prayer-Hearing God, New York: Fleming H. Revell, 1899.
- 이미지 출처(모두 위키미디어 공용에서 내려받아 크기를 줄여 사용함): 네게브 산지 와디 로츠의 들나귀 사진, Gideon Pisanty, CC BY 3.0 / 훌라 계곡 두루미 사진, 미노지그, CC BY-SA 4.0 / 윌리엄 블레이크 「친구들에게 책망받는 욥」(버츠 세트), 퍼블릭 도메인 / 존 워커의 아라비아 반도 지도, 프랑스 국립도서관, 퍼블릭 도메인 / 라셰이야트 엘 푸카르 토기장이 도판, 『Picturesque Palestine』(D. Appleton), 뉴욕 공립도서관, 퍼블릭 도메인 / 실완 암굴묘 사진, Jprg1966, CC BY-SA 4.0 / 요단 계곡 목자 사진(1919), 미국 식민지 사진부, 미국 의회도서관, 퍼블릭 도메인 / 텔 라기스 공성 토루 사진, DaringDonna, CC BY-SA 4.0 / 테베 하트노페르·라모세 무덤 아마포 사진, Daderot, 시카고대 오리엔트연구소 박물관, CC0 / 주기철 목사 사진, 퍼블릭 도메인 / 조선신궁 그림엽서, 퍼블릭 도메인 / 조지 뮐러 초상 삽화, 퍼블릭 도메인 / 애슐리 다운 고아원 건물 도판, 퍼블릭 도메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