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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차 (욥기 6장 ~ 욥기 9장)

귀스타브 도레, 「욥이 친구들과 이야기하다」(1866)

귀스타브 도레, 「욥이 친구들과 이야기하다」(1866)

5일차 (욥기 6장 ~ 욥기 9장)

본문

욥기 6장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나의 괴로움을 달아 보며 나의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
  3.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러므로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4.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5. 들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6.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7. 내 마음이 이런 것을 만지기도 싫어하나니 꺼리는 음식물 같이 여김이니라
  8. 나의 간구를 누가 들어 줄 것이며 나의 소원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랴
  9.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하나님이 그의 손을 들어 나를 끊어 버리실 것이라
  10.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
  11. 내가 무슨 기력이 있기에 기다리겠느냐 내 마지막이 어떠하겠기에 그저 참겠느냐
  12. 나의 기력이 어찌 돌의 기력이겠느냐 나의 살이 어찌 놋쇠겠느냐
  13. 나의 도움이 내 속에 없지 아니하냐 나의 능력이 내게서 쫓겨나지 아니하였느냐
  14.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
  15. 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그들은 개울의 물살 같이 지나가누나
  16. 얼음이 녹으면 물이 검어지며 눈이 그 속에 감추어질지라도
  17. 따뜻하면 마르고 더우면 그 자리에서 아주 없어지나니
  18. 대상들은 그들의 길을 벗어나서 삭막한 들에 들어가 멸망하느니라
  19. 데마의 떼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스바의 행인들도 그것을 사모하다가
  20. 거기 와서는 바라던 것을 부끄러워하고 낙심하느니라
  21. 이제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로구나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
  22. 내가 언제 너희에게 무엇을 달라고 말했더냐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을 선물로 달라고 하더냐
  23. 내가 언제 말하기를 원수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폭군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24.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25.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
  26. 너희가 남의 말을 꾸짖을 생각을 하나 실망한 자의 말은 바람에 날아가느니라
  27. 너희는 고아를 제비 뽑으며 너희 친구를 팔아 넘기는구나
  28. 이제 원하건대 너희는 내게로 얼굴을 돌리라 내가 너희를 대면하여 결코 거짓말하지 아니하리라
  29. 너희는 돌이켜 행악자가 되지 말라 아직도 나의 의가 건재하니 돌아오라
  30.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내 미각이 어찌 속임을 분간하지 못하랴

욥기 7장

  1.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2. 종은 저녁 그늘을 몹시 바라고 품꾼은 그의 삯을 기다리나니
  3.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니 고달픈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4.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5.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고 내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구나
  6.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희망 없이 보내는구나
  7. 내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리이다
  8.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9.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스올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10.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
  11.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
  12. 내가 바다니이까 바다 괴물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
  13. 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잠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할 때에
  14.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
  15. 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
  16.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
  17.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18.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19.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20.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내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21.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거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애써 찾으실지라도 내가 남아 있지 아니하리이다

욥기 8장

  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3.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4.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5.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6.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8.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9.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우리는 아는 것이 없으며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10. 그들이 네게 가르쳐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하지 아니하겠느냐
  11. 왕골이 진펄 아닌 데서 크게 자라겠으며 갈대가 물 없는 데서 크게 자라겠느냐
  12. 이런 것은 새 순이 돋아 아직 뜯을 때가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찍이 마르느니라
  13.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저속한 자의 희망은 무너지리니
  14. 그가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가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15. 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붙잡아 주어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
  16. 그는 햇빛을 받고 물이 올라 그 가지가 동산에 뻗으며
  17. 그 뿌리가 돌무더기에 서리어서 돌 가운데로 들어갔을지라도
  18. 그 곳에서 뽑히면 그 자리도 모르는 체하고 이르기를 내가 너를 보지 못하였다 하리니
  19. 그 길의 기쁨은 이와 같고 그 후에 다른 것이 흙에서 나리라
  20.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므로
  21. 웃음을 네 입에, 즐거운 소리를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22.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

욥기 9장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3.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4. 그는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그를 거슬러 스스로 완악하게 행하고도 형통할 자가 누구이랴
  5. 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며
  6. 그가 땅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시니 그 기둥들이 흔들리도다
  7. 그가 해를 명령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가두시도다
  8.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9.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
  10.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
  11.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12.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하고 누가 물을 수 있으랴
  13.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라합을 돕는 자들이 그 밑에 굴복하겠거든
  14. 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택하랴
  15.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대답하지 못하겠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할 뿐이며
  16.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
  17. 그가 폭풍으로 나를 치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깊게 하시며
  18. 나를 숨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을 내게 채우시는구나
  19. 힘으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그를 소환하겠느냐
  20.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온전할지라도 나를 정죄하시리라
  21. 나는 온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
  22. 일이 다 같은 것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23. 갑자기 재난이 닥쳐 죽을지라도 무죄한 자의 절망도 그가 비웃으시리라
  24. 세상이 악인의 손에 넘어갔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려졌나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냐
  25. 나의 날이 경주자보다 빨리 사라져 버리니 복을 볼 수 없구나
  26. 그 지나가는 것이 빠른 배 같고 먹이에 날아 내리는 독수리와도 같구나
  27. 가령 내가 말하기를 내 불평을 잊고 얼굴 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 할지라도
  28.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주께서 나를 죄 없다고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아나이다
  29. 내가 정죄하심을 당할진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
  30.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하게 할지라도
  31.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
  32.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으며 함께 들어가 재판을 할 수도 없고
  33.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34. 주께서 그의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그의 위엄이 나를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원하노라
  35. 그리하시면 내가 두려움 없이 말하리라 나는 본래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니라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본문 해설

침묵이 깨진 뒤의 대화: 욥기 6~9장

오늘은 연대기 일독의 다섯째 날입니다. 어제 우리는 욥이 하루아침에 자녀와 재산과 건강을 모두 잃고도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세 친구가 이레 동안 말없이 곁을 지켰다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침묵이 깨진 뒤에 이어지는 첫 번째 대화의 중심부입니다. 엘리바스의 훈계에 욥이 답하고(6~7장), 빌닷이 나서며(8장), 욥이 다시 응수하는(9장) 긴 대화를 함께 따라가 보겠습니다.

욥기의 짜임새를 먼저 눈에 담아 두면 길을 잃지 않습니다. 1~2장은 하늘과 땅의 사정을 함께 보여 주는 서막이고, 3~31장은 욥과 세 친구가 세 차례에 걸쳐 주고받는 변론이며, 32~37장은 젊은 엘리후의 말입니다. 이어서 38~41장에서는 하나님이 폭풍우 가운데 친히 말씀하시고, 42장에서는 욥이 회복되는 것으로 막이 내려집니다. 오늘 읽는 네 장은 변론의 첫 번째 순환에서 가장 뜨거운 대목입니다.

히브리어로 필사된 욥기 두루마리 사진, Pete unseth, CC BY-SA 3.0
히브리어로 필사된 욥기 두루마리 사진, Pete unseth, CC BY-SA 3.0

그렇다면 욥이 대답하는 상대, 곧 엘리바스는 앞서 무슨 말을 했을까요? 그는 한밤에 본 환상을 들려주며 죄 없이 망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고(욥 4:7),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 복이 있으니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권했습니다(욥 5:17). 말씨는 정중했습니다. 그러나 그 밑에는 “네게 숨은 죄가 있을 것"이라는 암시가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욥의 대답은 바로 그 암시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욥은 교훈을 주려고 지어낸 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시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14장 14절과 20절에서 노아와 다니엘 곁에 욥의 이름을 나란히 세우셨고, 야고보 사도는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라고 말하며 그를 실제 인물로 소개하셨습니다(약 5:11). 이 묵상집은 욥기를 실제로 있었던 한 사람의 역사 기록으로 읽겠습니다.

윌리엄 블레이크, 「욥의 위로자들」, 『욥기 삽화』 제7번(1825)
윌리엄 블레이크, 「욥의 위로자들」, 『욥기 삽화』 제7번(1825)

족장 시대의 무대: 욥은 언제 어디서 살았을까

욥기는 저자와 기록 시기를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 곳곳의 단서는 창세기의 족장들과 같은 시대의 풍경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욥의 재산은 양과 낙타와 소와 나귀 같은 가축으로 헤아려졌고(욥 1:3), 그는 가장으로서 자녀들을 위해 직접 번제를 드렸습니다(욥 1:5). 이스라엘 민족이나 시내산 율법, 성막에 관한 언급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베니 하산 크눔호텝 2세 무덤 벽화의 아무(아시아계 유목민) 행렬, 중왕국 12왕조, A.D. Riddle 등 촬영, 퍼블릭 도메인
베니 하산 크눔호텝 2세 무덤 벽화의 아무(아시아계 유목민) 행렬, 중왕국 12왕조, A.D. Riddle 등 촬영, 퍼블릭 도메인

욥은 시련을 겪은 뒤에도 140년을 더 살았는데(욥 42:16), 이는 수명이 차츰 줄어들던 족장 시대의 흐름과 맞닿는 대목입니다. 42장 11절에 나오는 “케쉬타"는 창세기에서 야곱이 땅을 살 때 치른 값에도 등장하는 단위입니다. 구약학자 글리슨 아처는 『구약 총론』에서 이러한 단서들을 근거로 욥기의 배경을 족장 시대로 보았고, 존 맥아더 목사도 『맥아더 스터디 바이블』 서론에서 욥을 족장 시대의 인물로 소개합니다. 이 연대기 일정표가 욥기를 창세기 11장 바로 다음, 아브라함이 부름받는 12장 앞에 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욥이 살았던 “우스 땅”(욥 1:1)은 에돔 남쪽에서 아라비아 북서부에 이르는 일대로 보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집니다(애 4:21 참조). 세 친구의 이름과 출신도 같은 지역을 암시합니다. 엘리바스의 고향 데만은 에서의 손자 이름을 딴 에돔의 성읍이고(창 36:11), 빌닷은 아브라함이 후처 그두라에게서 얻은 수아의 후손으로 짐작됩니다(창 25:2).

요르단 에돔 산지(엘기 마을 부근) 전경, 뒤쪽은 페트라의 사암 절벽, 베른하르트 모리츠 촬영, 미국 의회도서관 소장, 퍼블릭 도메인
요르단 에돔 산지(엘기 마을 부근) 전경, 뒤쪽은 페트라의 사암 절벽, 베른하르트 모리츠 촬영, 미국 의회도서관 소장, 퍼블릭 도메인

이들은 이스라엘 밖에서도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던 사람들이었던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방 땅에서도 참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가능했을까요? 가능했습니다. 홍수 이후 노아의 후손들에게 전해진 창조주에 관한 지식이 아직 이 지역에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 짚어 둘 것이 있습니다. 욥기의 대화는 시(詩)의 형식이라 은유와 과장이 많지만, 그렇다고 대화 자체가 꾸민 이야기라는 뜻은 아닙니다. 시편이 다윗의 실제 고백을 노래로 담았듯이, 욥기도 실제 고통 속에서 오간 실제 대화를 시로 엮은 기록입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 욥의 절규 하나하나가 훨씬 무겁고 사실적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욥기 6장: 저울에 달아 본 괴로움

욥은 엘리바스의 긴 훈계에 이렇게 응수합니다. “나의 괴로움을 달아 보며 나의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욥 6:2~3). 바다의 모래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을 빗대는 표현입니다. 욥은 같은 이유로 자기 말이 경솔했음을 인정하는데, 이는 고통의 무게가 말의 절제를 앞질러 버렸다는 고백으로 읽힙니다. 자기 말이 거칠다고 나무라기 전에 먼저 이 괴로움의 무게부터 달아 보라는 요청인 셈입니다.

이집트 중왕국 시대(12~13왕조)의 저울추(5데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CC0
이집트 중왕국 시대(12~13왕조)의 저울추(5데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CC0

욥은 자기 고통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6:4)라는 말은 독 묻은 화살에 맞은 사람처럼 온몸과 영혼으로 아픔이 번져 간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하지만 욥과 친구들이 알지 못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1~2장에서 사탄이 하나님의 허락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움직였다는 사실을 이미 확인했습니다(욥 1:12, 2:6).

그렇다면 하나님이 악을 만드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받지도 않으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약 1:13). 다만 사탄의 손을 정해진 한계 안에 묶어 두실 따름입니다. 욥은 하늘의 사정을 몰랐기에 화살을 쏜 손을 오직 하나님으로만 느꼈고, 독자인 우리는 욥보다 한 걸음 앞서 진실을 아는 자리에 서 있기에 더욱 겸손하게 그의 탄식을 들어야 합니다.

6장 11~13절에서 욥은 자기 기력이 바닥났음을 털어놓습니다. “내가 무슨 기력이 있기에 기다리겠느냐”(6:11)는 말은 더 견디라고 권하는 친구들에게 돌려주는 대답입니다. 그는 “나의 기력이 어찌 돌의 기력이겠느냐 나의 살이 어찌 놋쇠겠느냐”(6:12)라고 묻습니다. 사람은 돌도 놋쇠도 아니라는 이 단순한 사실을 잊고 고난당하는 이웃에게 무거운 기대를 얹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5~7절에서 욥은 짐승의 비유를 들어 항변하고 있습니다. 들나귀는 풀이 있으면 울지 않고 소는 꼴이 있으면 울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짐승조차 배고프거나 아플 때만 소리를 지르는데 하물며 사람이 이유 없이 울부짖겠느냐는 항변입니다.

이어서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고 묻는 것은 엘리바스의 훈계가 맛도 영양도 없는 음식 같았다는 한탄입니다. 아파서 우는 사람에게 “왜 우느냐"고 나무라는 일이 얼마나 쓸쓸한지, 우리도 경험으로 알지 않나요?

8~10절에서 욥은 차라리 하나님이 자기를 끊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음을 구한 사람이 성경에 여럿 있는데, 그때마다 하나님은 그를 정죄하기보다 먹이시고 위로하시며 다시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더 눈여겨볼 것은 10절의 고백입니다. 욥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절망이 깊은 자리에서도 믿음의 끈은 놓지 않았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마른 하천 같은 친구들: 욥기 6장 후반

6장 후반부(14~30절)의 중심은 친구들을 향한 서운함입니다. 욥은 자기 형제들을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물살처럼 지나간다고 탄식합니다(6:15). 여기서 “개울"로 옮긴 히브리어 “나할"은 평소에는 말라 있다가 비가 올 때만 흐르는 와디, 곧 마른 하천을 가리킵니다. 겨울에는 눈 녹은 물로 불어나 검게 흐르다가도, 여름 열기가 닥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개울이 바로 나할입니다.

네게브 사막의 마른 하천 바닥(나할 파란). 우기에만 물이 흐르는 이런 와디가 6장 15~20절의 배경입니다
네게브 사막의 마른 하천 바닥(나할 파란). 우기에만 물이 흐르는 이런 와디가 6장 15~20절의 배경입니다

그 개울을 믿고 길을 나선 대상들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데마와 스바의 행인들이 물을 찾아왔다가 말라붙은 바닥 앞에서 낙심하고 부끄러워했다고 합니다(6:19~20). 데마는 아라비아 북서부의 오아시스 도시 타이마로 알려졌고, 스바는 아라비아 남서부에서 향료 무역으로 번성하던 지역입니다. 광야의 장사꾼에게 물을 잃는다는 것은 곧 생명을 잃는다는 뜻이었으니, 욥이 친구들에게 느낀 실망의 크기를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북서부 타이마(데마) 오아시스의 옛 마을과 대추야자 숲
사우디아라비아 북서부 타이마(데마) 오아시스의 옛 마을과 대추야자 숲

욥은 친구들의 속마음을 날카롭게 짚어 냅니다.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6:21). 멀쩡하던 의인이 한순간에 무너진 모습을 보며, 친구들은 그 불행이 자기에게도 닥칠까 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행한 사람 곁에서 우리가 말을 서둘러 훈계로 바꾸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때로는 자신의 두려움을 가리려는 마음이 그 밑바닥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욥이 친구들에게 요구한 것은 많지 않았습니다. 재물을 달라거나 원수의 손에서 건져 달라고 한 적이 없고(6:22~23), 오히려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6:24)고 말하며 교정받을 마음의 문을 열어 두었습니다. 다만 구체적인 증거도 없이 고난의 이유를 죄로 몰아가는 책망이 “무엇을 책망함이냐"고 되묻고 있습니다. 매튜 헨리는 이 대목의 주해에서, 고난당하는 사람에게 동정을 베푸는 것이 친구의 마땅한 도리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29절의 “돌아오라"는 욥의 마지막 요청으로, 그는 친구들을 향해 행악자가 되지 말고 돌이키라고 권하며 “아직도 나의 의가 건재하니"라고 덧붙입니다. 이것은 교만한 자랑이 아니라 자신의 양심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선언으로 들립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조차 오해받는 자리에서, 사람들 앞에서 무죄를 증명할 길이 없을 때 신자가 기댈 곳은 어디일까요? 답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30절은 5~7절의 음식 비유로 돌아가 이 장을 마무리합니다.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내 미각이 어찌 속임을 분간하지 못하랴"라는 말은, 입맛이 상한 음식을 가려내듯 자기 입에서 나온 말이 거짓인지 참인지는 스스로 분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욥은 자기 정직함을 끝까지 붙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완전무결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욥이 7장 21절에서 곧바로 용서를 구하는 데서 알 수 있듯, 그는 정직하되 겸손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욥기 7장: 품꾼의 날과 잠 못 드는 밤

7장에서 욥의 목소리는 다시 낮아지고 깊어집니다.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7:1). 여기서 “힘든 노동"으로 옮긴 “차바"는 군대 복무나 고된 부역을 가리킬 때 쓰는 낱말입니다. 창세기 3장 17~19절에서 땅이 저주를 받아 사람이 평생 수고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기억하신다면, 욥의 탄식이 결코 낯설지 않으실 것입니다.

종은 저녁 그늘을 기다리고 품꾼은 삯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욥은 무엇을 기다렸을까요? 그는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니 고달픈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7:3)라고 토로합니다. 누우면 언제나 일어날까 하며 새벽까지 뒤척였고, 살에는 구더기와 흙덩이가 옷처럼 입혀졌다고 말합니다(7:4~5). 욥의 병은 아프기만 한 병이 아니라 날마다 몸이 썩어 가는 병이었습니다.

6~10절은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합니다.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고, 생명은 한낱 바람 같으며, 스올로 내려가는 자는 구름이 사라지듯 다시 올라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부활의 빛이 아직 환하게 비치지 않던 시대의 사람이 죽음 앞에서 느낀 막막함으로 보입니다. 욥은 훗날 19장에서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라고 고백하게 되는데, 오늘 본문은 그 확신이 얼마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 온 것인지를 일깨워 줍니다.

베니 하산 크눔호텝 무덤 벽화 모사도, 베 짜는 사람들(중왕국 12왕조), 노먼 드 가리스 데이비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CC0
베니 하산 크눔호텝 무덤 벽화 모사도, 베 짜는 사람들(중왕국 12왕조), 노먼 드 가리스 데이비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CC0

“스올"은 구약에서 죽은 자들이 머무는 곳을 가리키는 낱말입니다. 욥에게 죽음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길로만 보였지만,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 이 막막함에 마침표가 찍혔습니다(고전 15:20). 따라서 오늘 우리는 욥이 어둠 속에서 더듬던 부활의 소망을 이미 환하게 밝혀진 복음의 빛 아래서 읽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직접 올리는 항변: 욥기 7장 후반

11절부터 욥의 말투가 확연히 달라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친구들에게 하던 말을 멈추고, 이제 하나님께 직접 말을 겁니다. “내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을 생각하옵소서”(7:7)라고 호소했고,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7:11)라고 선언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고통을 설명하느라 지쳤던 욥이 마침내 고통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는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의 질문은 날카롭습니다. “내가 바다니이까 바다 괴물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7:12). “바다"와 “바다 괴물"은 히브리어로 “얌"과 “탄닌"인데, 창세기 1장 21절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큰 바다 짐승들"도 같은 계열의 낱말로 쓰였습니다. 어디로 날뛸지 모르는 거대한 짐승을 감시하듯 자기를 지켜보시는 하나님께, 저는 그렇게까지 위험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고 항변하는 모습입니다.

13~16절에서 욥은 잠자리마저 위로가 되지 못한다고 호소합니다. 눈을 붙이려 하면 꿈으로 놀라고 환상으로 두려워서,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겠다고까지 말합니다. 16절의 “헛 것"으로 옮긴 말은 히브리어 “헤벨"로, 훗날 전도서가 “헛되고 헛되도다"를 거듭할 때 쓰는 낱말과 같습니다. 내 날은 숨결처럼 사라진다는 이 한숨이, 그 지혜서의 문을 미리 두드리고 있는 셈입니다.

윌리엄 블레이크, 「욥의 악몽」, 『욥기 삽화』(1825~26),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CC0
윌리엄 블레이크, 「욥의 악몽」, 『욥기 삽화』(1825~26),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CC0

17~18절의 물음은 시편 8편 4절의 “사람이 무엇이기에"와 같은 문장으로 시작하는데, 시편에서는 사람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격의 찬양이었습니다. 그러나 욥기에서는 아침마다 살피시고 순간마다 단련하시는 시선이 너무 버겁다는 항변으로 쓰였습니다. 같은 질문이 믿음의 환희와 고통의 신음, 두 갈래로 터져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욥의 이 물음을 어떻게 받으실까요? 그 답은 38장 이후에서 만나게 됩니다.

20절에서 욥은 하나님을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감찰하다"로 옮긴 히브리어 “노체르"는 감시한다는 뜻 외에 지키고 보호한다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불평하는 입술이 무심코 하나님의 본모습, 곧 사람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고백을 흘려 낸 것이 아닐까요?

마지막 21절에서 욥은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라고 묻는데, 이는 죄 없는 완전한 사람이라는 주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용서가 필요한 존재임을 인정하면서도 이 고통의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는 호소입니다.

욥기 8장: 빌닷의 교훈, 맞는 말과 틀린 적용

8장에서는 두 번째 친구 빌닷이 입을 엽니다. 그는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8:2)라고 몰아붙입니다. 엘리바스가 환상과 경험에 기대어 말했다면, 빌닷은 옛사람들의 지혜와 전통에 기대어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욥의 항변을 하나님의 공의를 공격하는 불경으로 들었습니다.

빌닷의 첫 논리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8:3). 이 말 자체는 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불의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곧이어 그는 칼날 같은 말을 던졌습니다.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8:4).

괄호 속에 들어 있는 9절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빌닷은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우리는 아는 것이 없으며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고 말합니다. 자기들의 지식이 얼마나 얕은지 인정하는 말인데, 그렇다면 아는 것이 없다고 고백한 사람이 어떻게 남의 고난을 그토록 단정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한계를 말로는 인정하면서 행동으로는 잊어버리는 일이 우리에게도 흔하지 않나요?

이 한 구절이 욥의 가슴에 얼마나 깊은 상처를 냈을지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방금 자녀들을 한꺼번에 묻은 아버지에게 “네 자식들이 죄를 지어서 죽은 것"이라고 말한 셈입니다. 욥이 자녀들을 위해 번제를 드리던 아버지였음을 기억하면(욥 1:5), 이 말은 참을 가장한 가장 잔인한 말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를 말하는 것과 진리를 사랑으로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5~7절에서 빌닷은 해법을 내놓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간구하며 청결하고 정직하게 살면 반드시 돌보시고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고 합니다. 이 약속에는 아이러니가 숨어 있습니다. 욥은 실제로 마지막에 갑절의 복을 받았지만(욥 42:10~12), 그것은 빌닷의 공식이 맞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마지막에 빌닷의 무리를 향해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고 책망하십니다(욥 42:7).

8~10절에서 빌닷은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라고 권합니다. 전통의 지혜를 존중하는 일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조상의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이 최종 권위임을 일관되게 가르칩니다. 빌닷의 오류는 오랜 세월 전해 내려온 인생의 법칙을 하나님의 말씀과 똑같은 무게로 붙든 데 있었습니다.

『아멘엠오페의 교훈』 파피루스 사본(제3중간기, 서기관 세누 필사), 대영박물관 소장, 퍼블릭 도메인
『아멘엠오페의 교훈』 파피루스 사본(제3중간기, 서기관 세누 필사), 대영박물관 소장, 퍼블릭 도메인

파피루스와 거미줄: 빌닷의 두 비유

11~19절에서 빌닷은 두 가지 그림으로 악인의 말로를 설명합니다. 첫째는 “진펄 아닌 데서” 자라는 왕골과 “물 없는 데서” 자라는 갈대입니다. 개역개정의 각주는 왕골을 파피루스의 일종으로 풀이하는데, 이 식물은 물이 있어야만 사는 늪지의 풀이어서 물이 마르면 새순이 돋은 채로도 시들고 맙니다(8:12). 그래서 하나님을 잊은 사람의 희망은 거미줄 같다고 말합니다(8:14).

이집트 나일 강변에 자라는 파피루스(Cyperus papyrus). 8장 11절의 "왕골"은 이 식물의 일종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집트 나일 강변에 자라는 파피루스(Cyperus papyrus). 8장 11절의 "왕골"은 이 식물의 일종으로 알려졌습니다
센네줌과 티가 파피루스를 수확하는 장면, 센네줌 무덤(TT1) 벽화, 람세스 시대, 퍼블릭 도메인
센네줌과 티가 파피루스를 수확하는 장면, 센네줌 무덤(TT1) 벽화, 람세스 시대, 퍼블릭 도메인
거미줄에 맺힌 이슬방울(8장 14절의 "거미줄"), Luc Viatour, CC BY-SA 3.0
거미줄에 맺힌 이슬방울(8장 14절의 "거미줄"), Luc Viatour, CC BY-SA 3.0

둘째 그림은 돌무더기에 뿌리를 서려 놓은 나무입니다. 햇빛과 물을 받아 푸르게 뻗다가도 그 자리에서 뽑히면 땅조차 “내가 너를 보지 못하였다” 하며 모르는 체한다는 것입니다(8:16~18). 시로서는 훌륭하지만 욥에게 하는 말로서는 폭력이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잊은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20~22절은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라는 말도, 웃음과 즐거운 소리로 입을 채워 주시리라는 약속도 틀리지 않은 듯 위로의 말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어디가 문제일까요? 부분의 진리를 전체의 법칙으로 둔갑시킨 점입니다. 하나님은 의인을 끝내 버리지 않으시지만, 그 말이 “의인에게는 고난이 없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빌닷이 세운 전제를 예수님은 직접 뒤엎으셨습니다. 제자들이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며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라고 물었을 때, 주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답하셨습니다(요 9:2~3).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열여덟 사람에 대해서도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고 되물으며 아니라고 하셨습니다(눅 13:4~5). 고난과 죄를 일대일로 연결하는 빌닷의 공식은 주님이 친히 거부하신 틀입니다.

그렇다고 잠언의 가르침이 틀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의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망한다"는 원리는 일반적인 경향으로서는 참이지만, 개별 사건마다 들이대는 계산식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에게도 시련을 허락하시고, 그 이유를 때로는 평생 숨기시기도 합니다. 그 신비 앞에서 우리가 지어야 할 표정은 판단이 아니라 겸손과 동행이어야 하겠습니다.

별을 지으신 분 앞에서: 욥기 9장 전반

9장은 욥기 전체에서 가장 깊은 신학적 사색이 담긴 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욥은 빌닷의 말에 이렇게 답을 시작합니다.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9:2). 그는 빌닷이 틀렸다고 소리치기 전에 옳은 부분은 먼저 인정했습니다. 죄 있는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내세울 수 없다는 것은 욥도 아는 진리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의롭다"로 옮긴 히브리어 “차다크"는 법정에서 옳다고 인정받는 것, 곧 무죄와 옳음을 선언받는 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재판장 앞에서 “이 사람은 옳다"는 판결을 받을 수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이 질문은 신약에 이르러 칭의, 곧 “의롭다 하심"이라는 복음의 핵심 주제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고민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할 만큼 높으신 하나님을 상대로 억울한 사정을 따지려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장 전체는 법정의 언어로 가득해서 변론, 대답, 심판, 소환, 정죄, 재판, 판결자 같은 낱말이 거듭 나옵니다. 욥은 하나님과 재판을 벌이는 상상 속에서 자기 사건을 변론할 길을 더듬고 있는 것입니다.

4~10절은 하나님의 능력을 노래하는 찬가에 가깝습니다. 산을 옮기시고 땅의 기둥을 흔드시며, 해를 명령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고 별들을 가두신다고 노래합니다.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9:8)라는 구절은 창세기 1장 둘째 날에 궁창을 펴신 하나님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바다 물결을 밟으시는 분의 모습인데, 제자들은 이 장면이 갈릴리 호수 위에서 현실이 되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마 14:25).

10절에서 욥은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고 노래하는데, 이는 엘리바스가 5장 9절에서 했던 말과 거의 같습니다. 같은 문장이 두 사람의 입에서 나왔지만 끌어내는 결론은 전혀 달랐습니다. 엘리바스는 그러니 하나님께 간구하고 징계를 받아들이라고 권했고, 욥은 그렇게 크신 분 앞에서 내가 어찌 변론하겠는가라고 탄식했습니다. 같은 진리를 붙들고도 고난의 자리에 서 있는 사람과 구경하는 사람은 다르게 말하는 법입니다.

플레이아데스 성단(M45). 욥기 9장 9절의 "묘성"으로 알려진 별 무리
플레이아데스 성단(M45). 욥기 9장 9절의 "묘성"으로 알려진 별 무리

9절에는 구체적인 별자리 이름이 등장합니다.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 히브리어로는 “아쉬”, “케실”, “키마"이며, 흔히 큰곰자리 또는 북두칠성, 오리온자리, 플레이아데스 성단으로 풀이됩니다. 창세기 1장 14~18절에서 하나님이 넷째 날에 지으신 별들을 욥은 이미 이름으로 부르며 창조주를 찬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38장 31절에서 같은 별들을 다시 언급하며 욥에게 물으시는 장면도 뒤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오리온자리 일대를 촬영한 사진, 칠레 ESO 라 실라 천문대, Zdeněk Bardon/ESO, CC BY 4.0
오리온자리 일대를 촬영한 사진, 칠레 ESO 라 실라 천문대, Zdeněk Bardon/ESO, CC BY 4.0

11~13절에서 욥은 하나님이 자기 앞을 지나가셔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고 말하며,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겠느냐고도 묻습니다. 13절의 “라합"은 성경에서 때로 이집트를 가리키기도 하지만(시 87:4, 사 30:7), 여기서는 하나님께 대적하여 날뛰는 거대한 바다의 세력을 뜻하는 시적 이름으로 쓰였습니다. 이 표현이 이웃 나라의 신화를 사실로 받아들였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당시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힘의 이름을 빌려 그조차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는 점을 증언하는 시적 표현일 뿐입니다.

판결자 되신 그리스도: 욥기 9장 후반

14~20절에서 욥의 절망은 한층 깊어집니다. 가령 자기가 의로워도 하나님께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부르짖어 응답을 받는다 해도 그 음성을 들으셨다고 믿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17절에서는 “까닭 없이 내 상처를 깊게 하시며"라고 호소하는데, 하나님도 2장 3절에서 사탄이 “까닭 없이” 욥을 치게 했다고 말씀하셨으니 욥의 고난이 그의 죄 때문이 아니라는 점은 하늘이 먼저 증언하신 셈입니다.

그러면서도 욥은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9:20)라고 탄식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온전한 자"로 옮긴 말은 1장 1절에서 욥을 소개한 “온전하고 정직하여"의 “온전"과 같은 어근으로, 흠 없이 성실한 사람이라는 뜻이지 죄가 하나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쯤에서 중요한 구분을 짚어 둘 필요가 있습니다. 22~24절에서 욥은 “하나님이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고 말하며, 세상이 악인의 손에 넘어갔는데 그렇게 되게 한 이가 하나님이 아니면 누구냐고 따집니다. 이 말은 욥의 진심 어린 감정이었으나 옳은 말은 아니었습니다. 욥은 42장 3절에서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라고 스스로 고백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류가 섞인 말이 어떻게 성경에 실릴 수 있을까요? 성경의 무오는 기록된 모든 발언이 옳다는 뜻이 아니라, 그 발언이 실제로 그렇게 오갔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했다는 뜻입니다. 사탄이 한 말도, 세 친구가 한 말도, 고통 속의 욥이 한 말도 모두 정확하게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록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분별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시려는 것입니다.

25~31절에서 욥은 자기 날이 달리는 사람보다 빠르고 갈대배와 먹이를 덮치는 독수리 같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가장 아픈 구절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하게 할지라도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9:30~31). 눈 녹은 물과 잿물은 당시 가장 깨끗하게 씻는 방법이었습니다. 욥은 인간의 어떤 노력도 하나님 앞에서 충분히 깨끗할 수 없다는 막다른 골목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27~29절에는 욥의 정직한 면모가 또 하나 드러납니다. 그는 “내 불평을 잊고 얼굴 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 해 보아도 소용이 없다고 말합니다. 아픔을 감추고 괜찮은 척하는 것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숨기려는 거짓 경건보다 고통을 그대로 아뢰는 정직한 탄식이 오히려 하나님께 가깝다는 사실을, 욥의 이 고백은 조용히 가르쳐 줍니다.

그 막다른 골목에서 욥은 놀라운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으며 함께 들어가 재판을 할 수도 없고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9:32~33). “판결자"로 옮긴 히브리어 “모키아흐"는 분쟁하는 두 당사자 사이에서 판정하고 화해시키는 중재자를 뜻하는 낱말입니다. 구약학자 존 하틀리는 NICOT 욥기 주석에서 이 사람을 두 당사자 모두에게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중재자로 풀이했고, 손을 얹는다는 것은 그 권위를 나타내는 몸짓으로 이해됩니다.

루브르 박물관의 함무라비 법전 석비, Gil Dbd, CC BY-SA 4.0
루브르 박물관의 함무라비 법전 석비, Gil Dbd, CC BY-SA 4.0

욥은 이런 중재자가 없음을 한탄했지만, 하나님은 때가 차매 바로 그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선언합니다(딤전 2:5).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손을 얹으려면 그분은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셔야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이 말하는 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분입니다.

욥은 또 34절에서 “주께서 그의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 막대기는 욥에게서가 아니라 십자가 위의 한 사람에게 내려졌습니다(사 53:5).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 하고 느낄 만큼 부끄러운 죄인의 자리에,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로 지은 새 옷을 입혀 주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칭의, 곧 아들의 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는 은혜가 바로 이 일입니다. 바울은 그 은혜를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정리했습니다(롬 3:24).

고난과 소망: 오늘 본문에서 장차 올 나라까지

오늘 본문을 마무리하며 한 가지를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스코필드 관주성경』은 창세기 11장의 바벨 심판으로 인간 통치의 시대가 마감되고 12장에서 약속의 시대가 열린다고 구분합니다. 욥은 그 두 시대 사이의 어둠 속에 서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율법도 성막도 없던 시대에, 그는 오직 창조주를 향한 믿음 하나로 고난의 밤을 건넜습니다.

그 밤은 언제 끝날까요? 욥은 7장에서 “나의 눈이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리이다"라고 했지만, 그의 절망은 결국 하나님의 응답으로 뒤집힙니다. 성경은 이 일을 한 사람의 해피엔딩으로만 보지 않고 장차 올 나라의 그림자로 읽도록 이끄는 셈입니다. 야고보서 5장 11절은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고 말하며 욥의 이야기를 주님의 자비를 보여 주는 증거로 제시합니다.

욥의 소망은 이후 장들에서 조금씩 자라났습니다. 16장 19절에서 그는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고 말하고, 19장 25절에서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고 외칩니다. 오늘 9장에서 손을 얹을 판결자가 없다고 탄식하던 사람이 몇 장 뒤에는 하늘에 계신 중보자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의 질문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의 어둠 속에서 점점 더 분명한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면 그분은 천 년 동안 이 땅을 다스리시고(계 20:4~6),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계 21:4)라는 약속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욥이 밤마다 뒤척이며 새벽을 기다리던 그 갈망은 다시는 밤이 없을 그날에 완전히 채워집니다. 우리는 이 소망을 품고 오늘의 고난을 견뎌 냅니다.

마사다에서 바라본 아침의 사해, Grauesel, CC BY-SA 3.0
마사다에서 바라본 아침의 사해, Grauesel, CC BY-SA 3.0

묵상과 적용

오늘 본문을 읽으며 가장 먼저 마음에 와닿는 것은 하나님이 욥의 탄식을 그대로 기록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욥이 아무 불평 없이 순종하는 모습만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밤새 뒤척이며 “나를 놓으소서” 하고 부르짖는 장면, 하나님께 항변하는 장면까지 성경 한가운데 두셨던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고통 중에 하나님께 솔직히 말씀드리는 일이 믿음 없는 행동처럼 느껴져 입을 닫고 계시지는 않은가요? 믿는 사람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시험 속에서 마음이 무거워질 수 있습니다. 그런 근심 자체가 곧 불신의 증거는 아닙니다. 오늘 저녁 잠들기 전에 고통을 숨기지 말고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쏟아 놓으십시오. 시편의 탄식시처럼 한 문장이라도 소리 내어 적어 보셔도 좋습니다.

다만 욥의 항변을 그대로 따라 해서는 안 되는 대목도 있습니다. 욥은 9장 22절에서 하나님이 온전한 자와 악한 자를 똑같이 멸하신다고 단정했는데, 그것은 고통에서 나온 오해였습니다. 탄식하는 일과 하나님을 판단하는 일은 다르므로, 우리는 아픔을 쏟아 놓되 결론은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려야 합니다. 내 감정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판결문이 되지 않도록, 말씀 앞에서 거듭 확인하는 것이 성숙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욥이 잠 못 이루던 밤은 훗날 겟세마네 동산의 밤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은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말씀하시며(마 26:38) 땅에 엎드려 기도하셨고, 땀이 핏방울처럼 되도록 힘써 기도하셨습니다(눅 22:44). 죄 없으신 분도 고통을 숨기지 않고 아버지께 아뢰셨습니다. 우리의 탄식도 아픔을 정직하게 쏟아 놓으면서 마지막에는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아버지의 뜻 앞에 무릎을 꿇는 길로 이어져야 하는 법입니다.

둘째로, 이 본문은 고난당하는 이웃 곁에 서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욥의 친구들은 처음 이레 동안 아무 말 없이 곁에 앉아 있을 때가 가장 훌륭했습니다. 말을 시작하자 상처를 입히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병원 침상 곁에서, 실직한 친구 앞에서, 자녀를 잃은 부모 곁에서 쉽게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야"라거나 “혹시 죄가 있었던 건 아닐까” 하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그럴 때 욥이 6장에서 한 말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재물이나 해결책을 구하지 않았고 동정과 곁에 있어 주는 사랑을 구했습니다. 이번 주에 아픈 이웃에게 설명하는 대신 안부를 묻고, 충고하는 대신 오래 들어 주십시오. 전화 한 통, 식사 한 끼, 곁에 앉아 있는 한 시간이 수십 마디의 신학 강의보다 큰 위로가 됩니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서 “나는 저렇게 되지 않겠지” 하는 안도감이 올라올 때, 그것이 두려움에서 나온 훈계의 충동은 아닌지 점검해 보십시오.

더 놀라운 소식이 있습니다. 욥이 그토록 애타게 구했던 변치 않는 친구의 동정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증언합니다(히 4:15). 사람들이 마른 개울처럼 사라져 간 자리에서도 예수님은 끝까지 곁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밤 잠들기 전에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보시면 어떨까요?

셋째로, 빌닷의 자리를 늘 경계해야 하는 법입니다. 우리는 때로 말씀의 일반 원리를 붙들고 개별 사람의 아픔을 재단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형통한다”, “죄가 없으면 병도 없다” 같은 말이 그렇지만, 예수님은 날 때부터 눈먼 사람 앞에서 이런 공식을 정면으로 거부하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성도의 시련을 두고 이유를 추측하는 대화가 오가고 있다면, 그 자리에서 조용히 화제를 바꾸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빌닷의 문제는 사실을 틀리게 말한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은 일반 원리로는 맞았지만 사랑 안에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는 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은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자라 가라고 권하고, 로마서 12장 15절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명령합니다.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기 전에 “이 말이 사실인가"만 묻지 마시고, “이 말이 지금 이 사람을 세우는가"도 함께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자녀를 키우는 가정에서도 이 지혜는 그대로 통하는 법입니다. 아이가 아픈 일을 겪고 “하나님은 왜 이런 일을 허락하셨느냐"고 물을 때, 우리는 서둘러 정답을 들려주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때로는 “엄마도 다 알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은 안다"라고 함께 울며 말해 주는 편이 훨씬 아이의 신앙을 지켜 줍니다. 직장에서 해고되어 낙심한 동료에게도, 재정이 막혀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웃에게도 먼저 곁에 앉아 주는 사람이 되어 주십시오.

넷째로, 오늘 본문의 중심 메시지는 판결자 되신 그리스도입니다. 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손을 얹을 중재자가 없다고 한탄했지만, 우리는 이미 그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은혜를 얼마나 누리고 있을까요? 하나님 앞에서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 하고 느껴질 만큼 부끄러운 날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붙드십시오. 칭의의 확신은 오만이 아니라 감사의 뿌리입니다.

이 은혜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칭의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고, 성화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일이며, 두 은혜는 칭의의 순간부터 함께 시작되어 평생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밤도 성화의 현장이 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죄로 훼손되었음을 보았는데, 하나님은 고난까지 사용하셔서 그 형상을 우리 안에서 조금씩 회복해 가십니다. 불평이 기도로, 원망이 신뢰로 자라 가는 과정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마지막으로 우리는 재림의 소망 안에서 이 모든 고난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안다고 하며,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고 말합니다(요일 3:2~3). 오늘의 밤이 아무리 길어도, 욥이 갈망했던 새벽은 반드시 옵니다. 그날까지 우리는 정직하게 탄식하고, 서로를 위로하며, 판결자 되신 주님 안에서 견디겠습니다.

예화

코리 텐 붐과 베치: 구덩이보다 깊은 사랑

욥의 고난을 가장 가까이서 이해했던 20세기의 증인 가운데 코리 텐 붐이 있습니다. 네덜란드 하를럼에서 시계방을 하던 그녀의 가족은 나치 점령기에 집 안에 비밀 방을 만들어 유대인들을 숨겨 주었습니다. 1944년 2월 28일 밀고로 가족 전체가 체포되었고, 연로한 아버지는 열흘 만에 병원에서 숨을 거두고 만 것입니다. 코리와 언니 베치는 스헤베닝언 감옥과 포로수용소를 거쳐 그해 9월 독일의 라벤스브뤼크 여자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하를럼 바르텔요리스 거리 19번지의 텐 붐 시계점, 시 아카이브 사진(Collectie Fotoburo de Boer), Cees de Boer, 노르트홀란트 아카이브 소장, CC0
하를럼 바르텔요리스 거리 19번지의 텐 붐 시계점, 시 아카이브 사진(Collectie Fotoburo de Boer), Cees de Boer, 노르트홀란트 아카이브 소장, CC0

수용소의 막사는 비좁고 눅눅했으며, 침대 짚자리에는 벼룩이 들끓었습니다. 코리는 훗날 쓴 『주는 나의 피난처』(1971)에서, 병든 언니 베치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의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대로 벼룩까지 감사하자고 했던 일을 전합니다. 코리는 너무 기가 막혀 도저히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벼룩이 많아서 경비병들이 막사 안으로 좀처럼 들어오지 않았고 덕분에 여자들은 몰래 들여온 성경을 읽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라벤스브뤼크 추모지(옛 수용소)의 수용소 거리, Keijdo, 2020, CC0
라벤스브뤼크 추모지(옛 수용소)의 수용소 거리, Keijdo, 2020, CC0

이 이야기를 욥기 6~7장에 겹쳐 보면 의미가 더 깊어집니다. 베치의 감사는 고통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병들어 쇠약해졌고 결국 1944년 12월 16일 수용소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베치는 죽음이 다가올 즈음 코리에게 자신들이 이곳에서 배운 것을 세상에 전해야 한다고 했고, 코리는 그 말을 하나님이 더 깊이 계시지 않은 구덩이는 없다는 뜻으로 책에 옮겨 놓았습니다. 아무리 깊은 어둠 속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그보다 더 깊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열이틀 뒤, 코리는 행정상의 착오로 석방되었고 이후 60여 개국을 다니며 용서와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눈여겨볼 점이 있습니다. 베치는 고통받는 코리에게 “무슨 죄가 있었기에"라고 묻지 않았고, 대신 곁에서 같은 어둠을 걸으며 하나님을 바라보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욥에게 필요했던 친구가 바로 이런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스카우트 제복을 입은 코리 텐 붐(1921년경), 촬영자 미상, 퍼블릭 도메인
스카우트 제복을 입은 코리 텐 붐(1921년경), 촬영자 미상, 퍼블릭 도메인

코리가 전한 용서의 이야기 가운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습니다. 1947년 독일 뮌헨의 한 교회에서 집회를 마치자, 한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고 합니다. 그는 라벤스브뤼크에서 자신들을 감시하던 경비병이었고, 이제는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코리는 한동안 팔이 굳어 버린 듯 손을 들 수 없었지만, 용서할 힘이 자기에게 없음을 고백하며 주님의 용서를 구했고 그제야 그의 손을 잡을 수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붙든 사람은 마침내 상처를 준 사람까지 품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욥이 자신을 아프게 했던 친구들을 위해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그의 곤경을 돌이키셨음을 기억하면(욥 42:10), 이 이야기의 울림이 더욱 깊어집니다.

찰스 스펄전: 우울의 밤을 지난 설교자

복음주의 진영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로 꼽히는 찰스 해던 스펄전에게도 욥과 닮은 밤이 있었습니다. 칼빈주의 침례교인이었던 스펄전의 신학 전체를 따르지는 않지만, 그의 전기적 사실은 오늘 본문과 잘 어울립니다. 1856년 10월 19일 일요일 저녁, 22세의 스펄전은 런던의 서리 가든 뮤직홀에서 수천 명의 청중 앞에서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불이 났다고 외치는 바람에 사람들이 출구로 몰려들었고, 그 혼란 속에서 일곱 명이 목숨을 잃고 말았던 것입니다.

서리 뮤직홀(Surrey Music Hall), 1858년경, 『뉴 파크 스트리트 펄핏』(1858) 수록 삽화, 퍼블릭 도메인
서리 뮤직홀(Surrey Music Hall), 1858년경, 『뉴 파크 스트리트 펄핏』(1858) 수록 삽화, 퍼블릭 도메인

스펄전은 한 달 전에 쌍둥이 아들을 얻은 아버지였고, 이 사건은 젊은 목사의 영혼을 산산이 부수었습니다. 그는 한동안 설교는커녕 잠도 자지 못하는 형편이어서 지인의 집에서 회복을 기다려야 하는 형편이었던 것입니다. 신문들은 그의 대중적인 설교 방식을 비난했습니다. 욥이 겪은 육체의 고통과 친구들의 비난이 그에게도 함께 찾아온 셈입니다.

찰스 해던 스펄전 초상 사진, 웨일스 국립도서관 소장(웨일스 초상 컬렉션), 퍼블릭 도메인
찰스 해던 스펄전 초상 사진, 웨일스 국립도서관 소장(웨일스 초상 컬렉션), 퍼블릭 도메인

스펄전은 평생 우울과 통풍, 신장병으로 고통받았고 이 사실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1875년에 출간된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한 강의』(Lectures to My Students)에는 「목회자의 기절 발작」이라는 강의가 실려 있는데, 그는 자신이 깊은 우울을 자주 겪었음을 고백하며 설교자도 그런 날을 지나간다고 학생들에게 가르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1892년 프랑스 망통에서 57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통 속에서도 설교단을 지켰습니다.

여러분은 스펄전의 이야기에서 어떤 위로를 얻으시나요? 믿음 좋은 사람도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가고, 하나님은 그 골짜기에서 신음하는 종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욥도, 스펄전도, 코리 텐 붐도 고통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붙들었기에 오늘까지 우리에게 증언이 됩니다. 이제 그 증언 위에 서는 것은 우리 차례입니다.

기도

오늘 우리는 먼저 자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솔직하게 마음을 쏟아 놓을 용기를 구하며, 동시에 그 탄식이 하나님을 판단하는 말로 변하지 않도록 지켜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칭의의 은혜를 날마다 새롭게 누리고, 시련의 시간 속에서도 성화의 길을 걷게 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가정을 위해서는, 아픔을 겪는 가족 곁에서 정죄하거나 서둘러 설명하려 하지 않고 말없이 곁을 지키는 부모와 자녀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는, 고난당하는 성도의 이유를 캐묻는 교회가 아니라 눈물을 함께 흘리는 교회가 되기를 구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병과 가난, 실직과 외로움으로 잠 못 이루는 이웃들이 위로를 얻고, 열방에서 박해받는 형제자매들 위에 판결자 되신 그리스도의 위로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저울에 달 수 없는 우리의 모든 눈물을 헤아려 아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 오늘 말씀 앞에 나아왔습니다. 욥의 밤을 기록으로 남기시고 그 탄식까지 말씀 속에 품어 주신 주님의 넓은 품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때로 구더기 같은 아픔과 뒤척이는 밤을 지나며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느끼지만, 주님은 우리의 한숨 하나도 놓치지 않으신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고통 속에서도 주님께 말씀드릴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 욥처럼 우리도 주님을 오해하며 말했던 날들이 있었음을 고백드립니다. 고난 앞에서 주님의 선하심을 의심했고, 이웃의 아픔 앞에서 위로 대신 판단을 앞세웠으며, 말씀의 원리를 붙들고 사람을 재단했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빌닷의 자리에 서 있던 우리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시고, 곁에 앉아 함께 우는 친구의 마음을 부어 주옵소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가 없다고 탄식하던 욥의 외침에, 때가 차매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응답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대신 막대기를 맞으시고 우리 대신 정죄를 받으신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제 하나님 앞에서 담대히 설 수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우리 안에 시작하신 성화의 일을 고난 속에서도 멈추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서 회복되게 하여 주옵소서.

다시 오실 주님,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고 다시는 사망도 애통도 아픔도 없게 하실 그날을 소망합니다. 그날까지 깨어 기도하며 서로의 짐을 나누어 지고 걸어가게 하여 주옵소서. 마른 개울 같은 사람이 되지 않고 곁에 머무는 벗이 되도록, 오늘 만나는 아픈 이웃 한 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밀게 하여 주옵소서. 이 부족한 기도를 판결자 되신 주님께 올려 드립니다.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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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퍼런스

  1.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대한성서공회, 1998. 본문 출처: https://www.bskorea.or.kr
  2. Gleason L. Archer Jr., A Survey of Old Testament Introduction, rev. ed., Chicago: Moody Publishers, 1994.
  3. John MacArthur, ed., The MacArthur Study Bible, Nashville: Word Publishing, 1997. (욥기 서론)
  4. John E. Hartley, The Book of Job,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88. (욥 9:32~35 주해)
  5. Matthew Henry, Commentary on the Whole Bible, Vol. 3 (Job to Song of Solomon), 1708–1710;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판 참조. (욥 6:14 주해)
  6. C. I. Scofield, ed., The Scofield Reference Bibl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09. (창 8:20, 11:9, 12:1 주)
  7. John Wesley, “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 (Sermon 43, 1765), in The Works of John Wesley, Vol. 2, ed. Albert C. Outler, Nashville: Abingdon Press, 1985.
  8. John Wesley, “Heaviness through Manifold Temptations” (Sermon 47, 1760), in The Works of John Wesley, Vol. 2, ed. Albert C. Outler, Nashville: Abingdon Press, 1985.
  9. Corrie ten Boom with John and Elizabeth Sherrill, The Hiding Place, Washington Depot: Chosen Books, 1971. (한국어판 『주는 나의 피난처』); Corrie ten Boom with Jamie Buckingham, Tramp for the Lord, Old Tappan: Fleming H. Revell, 1974. (1947년 뮌헨에서의 용서 일화)
  10. C. H. Spurgeon, Lectures to My Students, First Series, London: Passmore & Alabaster, 1875, Lecture 11 “The Minister’s Fainting Fits”.
  11. 이미지 출처(모두 위키미디어 공용에서 내려받아 크기를 줄여 사용함): 귀스타브 도레 「욥이 친구들과 이야기하다」(1866), 퍼블릭 도메인 / 윌리엄 블레이크 「욥의 위로자들」(1825, 미국 국립미술관 소장), CC0 / 나할 파란 마른 하천 사진, Wilson44691, 퍼블릭 도메인 / 타이마 옛 마을 사진, Richard Mortel, CC BY 2.0 / 파피루스 사진, Krzysztof Ziarnek(Kenraiz), CC BY-SA 4.0 / 플레이아데스 성단 사진, NASA, ESA, AURA/Caltech, Palomar Observatory, 퍼블릭 도메인 / 욥기 두루마리 사진, Pete unseth, CC BY-SA 3.0 / 크눔호텝 2세 무덤 아무 행렬 벽화, A.D. Riddle 등 촬영, 퍼블릭 도메인 / 에돔 산지 사진, 베른하르트 모리츠, 미국 의회도서관, 퍼블릭 도메인 / 이집트 저울추 및 크눔호텝 무덤 직조 장면 모사도(노먼 드 가리스 데이비스) 및 블레이크 「욥의 악몽」,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CC0 / 『아멘엠오페의 교훈』 파피루스, 대영박물관, 퍼블릭 도메인 / 센네줌 무덤 파피루스 수확 벽화, 퍼블릭 도메인 / 거미줄 사진, Luc Viatour, CC BY-SA 3.0 / 오리온자리 사진, Zdeněk Bardon/ESO, CC BY 4.0 / 함무라비 법전 석비 사진, Gil Dbd, CC BY-SA 4.0 / 사해 일출 사진, Grauesel, CC BY-SA 3.0 / 하를럼 텐 붐 시계점 사진, Cees de Boer, 노르트홀란트 아카이브, CC0 / 라벤스브뤼크 추모지 사진, Keijdo, CC0 / 코리 텐 붐 사진, 퍼블릭 도메인 / 서리 뮤직홀 삽화, 『뉴 파크 스트리트 펄핏』(1858), 퍼블릭 도메인 / 스펄전 초상 사진, 웨일스 국립도서관, 퍼블릭 도메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