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차 (창세기 8장 ~ 창세기 11장)
아라랏 산의 두 화산 봉우리(대 아라랏과 소 아라랏), 아르메니아 아라랏 평원에서 촬영, Vyacheslav Argenberg
본문
창세기 8장
-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백오십 일 후에 줄어들고
- 일곱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 물이 점점 줄어들어 열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 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 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 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 육백일 년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니
- 둘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말랐더라
-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고
-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의 아내와 그 며느리들과 함께 나왔고
- 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창세기 9장
-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
- 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더라
창세기 10장
-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 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
- 고멜의 아들은 아스그나스와 리밧과 도갈마요
- 야완의 아들은 엘리사와 달시스와 깃딤과 도다님이라
-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
-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 구스의 아들은 스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요 라아마의 아들은 스바와 드단이며
-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읍이라
- 미스라임은 루딤과 아나밈과 르하빔과 납두힘과
- 바드루심과 가슬루힘과 갑도림을 낳았더라 (가슬루힘에게서 블레셋이 나왔더라)
- 가나안은 장자 시돈과 헷을 낳고
- 또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 히위 족속과 알가 족속과 신 족속과
- 아르왓 족속과 스말 족속과 하맛 족속을 낳았더니 이 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나아갔더라
- 가나안의 경계는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였더라
- 이들은 함의 자손이라 각기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
-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
- 아람의 아들은 우스와 훌과 게델과 마스며
-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았으며
-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
- 욕단은 알모닷과 셀렙과 하살마웻과 예라와
- 하도람과 우살과 디글라와
- 오발과 아비마엘과 스바와
- 오빌과 하윌라와 요밥을 낳았으니 이들은 다 욕단의 아들이며
- 그들이 거주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쪽 산이었더라
- 이들은 셈의 자손이니 그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
- 이들은 그 백성들의 족보에 따르면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그 땅의 백성들이 나뉘었더라
창세기 11장
-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 셈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셈은 백 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 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오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 아르박삿은 삼십오 세에 셀라를 낳았고
- 셀라를 낳은 후에 사백삼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 셀라는 삼십 세에 에벨을 낳았고
- 에벨을 낳은 후에 사백삼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 에벨은 삼십사 세에 벨렉을 낳았고
- 벨렉을 낳은 후에 사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 벨렉은 삼십 세에 르우를 낳았고
- 르우를 낳은 후에 이백구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 르우는 삼십이 세에 스룩을 낳았고
- 스룩을 낳은 후에 이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 스룩은 삼십 세에 나홀을 낳았고
- 나홀을 낳은 후에 이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 나홀은 이십구 세에 데라를 낳았고
- 데라를 낳은 후에 백십구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
-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본문 해설
홍수 이후의 세계: 창세기 8~11장
어제 우리는 가인의 살인과 노아 시대의 극심한 타락, 그리고 방주의 문이 닫히는 장면까지 읽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방주의 문이 다시 열리는 순간에서 시작해 무지개 언약과 민족들의 갈래, 바벨탑의 흩어짐, 아브람이 등장하기 직전의 족보까지 이어집니다. 짧게 말씀드리면 심판 뒤에 찾아온 새 출발이 어떻게 다시 무너지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그 무너진 자리에서 구원의 길을 어떻게 이어 가시는지를 보여 주는 네 장입니다. 홍수가 땅은 씻었지만 사람의 마음까지 씻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마음에 두고 함께 걸어 보시기 바랍니다.
연대기 순서로 읽는 우리의 여정에서 이 본문 다음에는 욥기가 이어집니다. 욥기의 배경이 족장 시대로 보이기 때문에, 창세기 11장에서 아브람이 막 등장하려는 시점에 욥의 이야기를 끼워 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은 인류의 원역사가 마무리되고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되기 직전의 다리 같은 구간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네 장을 한 줄로 꿰는 열쇠는 무엇일까요? 저는 “다시 시작“이라는 말을 꼽고 싶습니다. 8장에서는 땅이 마르며 새 세상이 열리고, 9장에서는 하나님이 노아와 언약을 세우십니다.
10장에서 인류가 다시 번성하는가 싶더니, 11장에서는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께 맞서다가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끝에서 아브람이라는 한 사람을 통한 새로운 구원의 계획이 조용히 준비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눈과 홍수의 실재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홍수를 어떤 눈으로 읽을지 분명히 해 두겠습니다. 이 묵상집은 창세기 6~9장의 홍수를 온 세상을 덮은 실제 역사적 심판으로 받아들입니다. 7장 19~20절은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겼더니 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나 오르니 산들이 잠긴지라"고 기록하며, 베드로후서 3장 6절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라고 증언합니다.

일부에서는 홍수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국한된 큰 범람이었다는 지역 홍수설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이 견해에는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9장 11절에서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셨는데, 만일 지역 홍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껏 세계 곳곳에서 거대한 범람이 수없이 일어났으니 하나님의 약속이 번번이 깨어진 셈이 되고 맙니다.
존 위트콤과 헨리 모리스는 1961년 『창세기 대홍수』에서 이 논리를 비롯한 여러 근거로 전 지구적 홍수를 변호했습니다. 홍수가 지역 사건이었다면 노아가 방주를 짓고 일 년 넘게 그 안에서 지낼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새들이 다른 곳으로 날아가 살면 그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 사건의 실재를 전제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37). 지나간 일이 실제로 있었기에 다가올 일을 경고하는 말씀도 힘을 얻습니다. 성경은 홍수를 신화나 은유로 다루지 않고 다가올 심판을 미리 보여 주는 실제 사건으로 증언합니다.
창세기 8장: 노아를 기억하신 하나님
8장은 한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8:1). 구약학자 고든 웬함은 1978년 『베투스 테스타멘툼』에 실은 논문 「홍수 이야기의 일관성」에서 홍수 이야기가 이 구절을 정점으로 앞뒤가 대칭을 이루는 구조임을 지적했습니다. 물이 불어난 기간이 150일이고(7:24), 줄어든 기간도 150일이며(8:3), 이야기의 한가운데에 “기억하사"가 놓여 있다는 관찰입니다. 이는 문학 구조에 관한 사실 자료로 참고할 뿐, 그의 다른 신학적 결론까지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잠시 노아를 잊고 계셨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히브리어 “자카르”(기억하다)는 머릿속에서 떠올린다는 뜻을 넘어 약속에 따라 행동에 나서신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출애굽기 2장 24절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사” 구원을 시작하신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방주 안의 노아에게도 이 말씀은 “내가 너를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다"는 뜻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8:1)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바람"으로 옮긴 “루아흐"는 창세기 1장 2절에서 수면 위에 운행하시던 “영"과 같은 단어입니다. 많은 주석가들이 이 대목에서 물 위에 새 세상이 다시 빚어지는 모습을 읽어 냅니다.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는 장면(8:2)은 7장 11절의 사건이 거꾸로 되감기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8장에는 날짜가 아주 꼼꼼하게 적혀 있습니다. 7장 11절의 둘째 달 열이렛날에 시작된 홍수는 150일이 지난 일곱째 달 열이렛날(8:4)에 방주가 땅에 닿는 것으로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다섯 달이 정확히 150일이니 한 달을 30일로 셈한 달력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노아는 홍수가 시작된 날부터 땅이 완전히 마른 날(8:14)까지 일 년 열흘 남짓을 방주 안에서 지낸 셈입니다. 이처럼 날짜까지 남긴 것은 이 기록이 꾸며 낸 이야기가 아니라 현장에 있던 증인의 일지임을 보여 줍니다.
방주가 머문 곳은 “아라랏 산”(8:4)입니다. 원문은 “아라랏의 산들 위에"라는 복수형이어서, 한 봉우리가 아니라 아라랏이라는 산악 지대를 가리킵니다. 아라랏은 아시리아 비문에 “우라르투"라는 나라 이름으로 등장하는 곳으로, 지금의 아르메니아와 튀르키예 동부 고원 지대에 해당합니다. 방주가 정확히 어느 봉우리에 닿았는지는 성경이 말하지 않으며, 우리도 그 위치를 단정하지 않습니다.


까마귀와 비둘기: 기다림의 신학
노아는 사십 일을 지나 방주의 창문을 열고 까마귀를 먼저 내보냈습니다(8:6~7). 까마귀는 썩은 고기를 먹는 새여서 물 위를 떠다니는 사체에 내려앉아 얼마든지 쉴 수 있었고, 그래서 돌아오지 않고 이리저리 날아다녔습니다. 반면 비둘기는 깨끗한 새이면서 마른 땅이 아니면 쉴 곳이 없는 새였습니다.
비둘기는 처음에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 노아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8:9)라는 표현은 참으로 따뜻합니다.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내보내자 비둘기는 저녁때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돌아왔고(8:11), 다시 칠 일 뒤에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8:12). 이 일곱째 날의 간격을 두고 많은 해석자들은 노아가 안식의 리듬을 따라 기다렸다고 풀이합니다.

더 주목할 대목은 그다음입니다. 8장 13절에서 노아는 방주 뚜껑을 열고 땅이 걷힌 것을 직접 보았고, 14절에서는 땅이 완전히 말랐습니다. 그런데도 노아는 방주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노아는 무엇을 기다렸을까요? 그가 기다린 것은 하나님이 “나오라”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8:15~16).
눈으로 보기에 이미 안전해 보여도 들어갈 때도 나올 때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던 것입니다. 본문의 날짜를 따라가 보면 노아는 물이 걷힌 것을 직접 본 뒤로도 두 달 가까이를 더 기다렸던 셈입니다.
혹시 “상황이 다 풀린 것 같은데 왜 하나님은 움직이라고 하지 않으실까” 하는 답답함을 느끼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럴 때 이 본문이 큰 위로가 됩니다. 방주 안의 시간은 낭비된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장 안전한 때를 고르고 계시던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의 홍수 이야기와 성경의 홍수
홍수 이야기는 성경에만 있지 않습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서사시 「길가메시」 열한째 토판에는 우트나피쉬팀이라는 사람이 신의 경고를 받고 배를 지어 대홍수를 피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토판은 1872년 대영박물관의 조지 스미스가 아슈르바니팔 도서관 출토 점토판에서 읽어 내어 세상을 놀라게 했고, 1876년 『칼데아인의 창세기 기사』로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면 창세기가 이 이야기를 빌려 온 것일까요? 우리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이 묵상집이 따르는 입장은 홍수의 참된 기억이 노아의 후손 모두에게 전해졌고, 하나님을 떠난 민족들이 그것을 신화로 일그러뜨렸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의 수많은 민족이 저마다 대홍수 전승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든 인류가 한 조상에게서 나왔다는 성경의 증언과 잘 맞아떨어집니다.
두 이야기의 차이를 살펴보면 이 점이 더욱 선명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신들은 홍수가 시작되자 자기들이 일으킨 재앙에 겁을 먹고 개처럼 웅크립니다. 같은 지역의 다른 서사시 「아트라하시스」에서는 사람이 너무 시끄럽게 번성하여 신이 잠을 이루지 못하자 홍수를 보낸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홍수 뒤에 우트나피쉬팀이 제사를 드리면 굶주린 신들이 파리 떼처럼 제물 위로 모여듭니다.

반면 창세기의 하나님은 땅에 죄악과 포악이 가득하기 때문에 심판하십니다(6:11~13). 그 심판 속에서도 한 의인과 그의 가족을 지키시고, 홍수 뒤에는 제물에 굶주려서가 아니라 은혜로 언약을 세우십니다. 길가메시의 배는 가로와 세로와 높이가 같은 정육면체에 가까운 모양으로 묘사되지만, 창세기의 방주는 길이 300규빗, 너비 50규빗, 높이 30규빗의 긴 직육면체 선박입니다(6:15). 그러니 어느 쪽이 실제 항해를 염두에 둔 목격자의 기록에 가까운지는 분명하지 않을까요?
번제와 향기: 8장 20~22절
방주에서 내려선 노아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집을 짓는 일도 밭을 가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제단"이라는 말이 나오는 8장 20절에서, 노아는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정결한 짐승과 새로 번제를 드립니다. 번제는 “올라가는 제사"라는 뜻으로, 제물 전체를 불살라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헌신의 제사입니다.

여기에는 눈여겨볼 대목이 하나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홍수 전에 노아에게 정결한 짐승을 암수 일곱씩 데려오라고 하셨는데(7:2), 바로 그 가운데 일부가 지금 제단 위에 오릅니다. 짐승이 다시 번성해야 하는 마당에 귀한 정결한 짐승을 불사른다는 것은 노아에게 감사가 계산보다 앞서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예배라는 사실을 이 장면이 조용히 가르쳐 주는 셈입니다.
21절은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라고 전합니다. 여기서 “향기"로 옮긴 “레아흐 하니호아흐"는 “진정시키는 향기”, 곧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향기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노아"라는 이름과 같은 어근에서 나왔는데, 노아의 이름이 “안위, 쉼"이라는 뜻이니(5:29) 이름에 담긴 말놀이가 제단에서 이루어진 셈입니다. 에베소서 5장 2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말씀하며, 이 향기가 십자가의 그림자임을 시사합니다.
그 향기를 받으신 하나님의 선언은 놀랍습니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8:21). 홍수 전에 심판의 이유로 제시된 문장(6:5)과 거의 같은 내용이 이번에는 자비의 이유로 쓰였습니다. 인간이 홍수 뒤에 나아졌기 때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홍수가 땅은 씻었어도 사람의 마음은 그대로라는 진단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창세기 6장 5절이 보여 주듯 사람의 마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에서 떨어져 나가 스스로 고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 진단은 8장 21절의 진단과 그대로 맞닿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홍수 뒤의 세상을 지탱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사람의 선함이 아니라 제단에서 올라간 향기, 곧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희생입니다.
이어서 22절은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합니다. 이는 홍수 이후의 자연이 일정한 질서 속에 돌아가리라는 하나님의 보증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20~21절은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여덟 사람을 세례의 모형으로 언급하며, 구원이 심판의 물을 통과하는 은혜임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창세기 9장: 새 출발과 인간 통치의 시작
9장 1절에서 하나님은 노아와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1장 28절의 창조 명령이 새 세상에서 다시 주어진 것으로, 하나님이 인류의 사명을 거두지 않으셨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2절부터는 달라진 점이 있습니다. 짐승들이 사람을 “두려워하며 무서워하게” 되었고, 3절에서 하나님은 처음으로 동물의 고기를 먹도록 허락하십니다.

고기를 먹는 데에는 조건이 붙었습니다.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9:4). 그렇다면 왜 하필 피일까요? 피는 생명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훗날 레위기 17장 11절은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라고 설명했고, 사도행전 15장 20절의 예루살렘 회의도 이방인 신자들에게 피를 멀리하라고 권했습니다. 피에 대한 이 금지는 속죄의 피를 거룩하게 여기라는 가르침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다음 5~6절은 인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를 선포합니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살인이 엄중히 다스려져야 하는 까닭을 하나님의 형상에서 찾는 것입니다. 1일차에서 살펴본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 이후에도 지워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 구절이 분명하게 확인해 줍니다. 형상은 훼손되었으나 사라지지 않았기에 사람의 생명은 여전히 존귀한 법입니다.
바로 여기서 스코필드 관주성경이 말하는 세 번째 경륜, 곧 인간 통치의 시대가 열립니다. 스코필드는 8장 20절 주에서 이 시대가 노아의 번제에서 시작해 바벨탑의 심판으로 끝난다고 보았고, 세대주의 해석자들은 살인자를 처벌하라는 9장 6절을 인간 정부 제도의 기초로 이해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3장 4절에서 통치자를 악을 행하는 자에게 보응하는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부른 것도 같은 뿌리에서 나온 가르침입니다.

무지개 언약: 활을 거신 하나님
8~17절은 하나님이 직접 세우시는 노아 언약을 담고 있습니다. 이 짧은 단락에서 “내가 세우리니"라는 표현이 거듭 나오는데, 언약의 주체가 전적으로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노아는 아무 조건도 이행할 필요가 없으며 그저 받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또 이 언약을 노아와 그 후손에게만 아니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에게까지 넓히시고 “영원한 언약"이라 이름 붙이십니다(9:12, 16).
그렇다면 이 언약의 증거는 무엇일까요? 바로 구름 속에 둔 무지개입니다. 히브리어 “케쉐트"는 본래 전쟁에 쓰는 활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하나님이 심판의 활을 구름 위에 걸어 두셨다는 그림으로 이 대목을 이해하며, 움베르토 카수토 역시 『창세기 주석』 제2권에서 이 장면을 하나님이 무기를 내려놓으시는 모습으로 풀었습니다. 활이 하늘에 걸려 있다는 것은 더 이상 땅을 겨누지 않겠다는 약속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눈에 띄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보고 기억하리라”(9:14~16)고 하십니다. 이 증거는 사람이 보고 안심하라는 표지이기에 앞서 하나님이 스스로 약속을 기억하시기 위한 표지로 먼저 제시된다는 점입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에도, 사람의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에도 약속을 붙드시는 쪽은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요한계시록 4장 3절은 하늘 보좌 둘레에 무지개가 있다고 증언하는데, 이는 이 언약이 영원한 보좌 앞에서 지금도 효력이 있음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노아의 실패와 가나안의 저주
18~29절은 노아의 아름다운 모습 뒤에 숨은 쓰라린 장면을 정직하게 기록합니다. 방주를 짓고 심판을 통과한 그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장막 안에서 벌거벗고 누웠습니다(9:21). 홍수로 세상이 씻겼어도 새로 시작한 가정 안에 죄가 이미 들어와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성경은 영웅의 허물도 가리지 않고 드러내는데, 이는 오직 하나님만이 의로우신 분임을 알리려는 것입니다.


가나안의 아버지 함은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고 밖으로 나가 두 형제에게 알렸습니다(9:22). 반면 셈과 야벳은 옷을 가져다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 아버지의 하체를 덮고 얼굴을 돌렸습니다(9:23). 같은 장면을 보고도 한 사람은 소문을 퍼뜨렸고 두 사람은 허물을 덮은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의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는 말씀이 이 장면에서 그대로 살아납니다.
그렇다면 술이 깬 노아는 누구를 저주했을까요? 그가 저주한 대상은 함이 아니라 함의 아들 가나안입니다(9:25). 여기서 분명히 해 둘 점이 있습니다. 이 저주는 가나안과 그 후손에게 선포된 것이지, 함의 모든 후손이나 특정 인종에게 내려진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어떤 사람들이 이 본문을 끌어와 노예제와 인종 차별을 정당화했던 일은 성경에 대한 심각한 오용이자 죄였습니다. 이 저주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의 거민을 복속시킨 역사와 솔로몬 시대에 남은 가나안 족속이 노역에 동원된 일(왕상 9:20~21)로 성취되었습니다.
반대로 26~27절에서 노아는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축복합니다. 이 말은 앞으로 구원의 계보가 셈의 후손을 통해 이어질 것을 내다본 예언입니다. 또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라는 대목은 이방 민족들이 훗날 셈의 계보를 통해 오신 메시아의 복에 참여하게 될 것을 미리 보여 주는 말씀으로 풀이됩니다. 노아는 홍수 뒤에도 삼백오십 년을 더 살고 구백오십 세에 죽었으며(9:28~29), 그의 이야기는 이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창세기 10장: 민족들의 족보
10장은 흔히 “민족 목록"이라 부르는 족보입니다. 야벳 계열 14명, 함 계열 30명, 셈 계열 26명으로 모두 합쳐 70개의 이름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70은 흔히 완전한 수로 쓰이며, 이 목록은 온 인류가 노아의 세 아들에게서 나왔음을 보여 주는 한 장의 지도 같습니다. 고고학자 윌리엄 올브라이트가 이 목록을 두고 놀랄 만큼 정확한 문서라고 평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고대 세계의 다른 문헌에서 민족들을 이처럼 하나의 혈통으로 묶어 정리한 사례는 찾기 어렵다고 평가됩니다.

목록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 여럿 보입니다. 야벳의 아들 마대는 훗날의 메대 사람, 야완은 헬라 지역의 이오니아 사람과 이어지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함의 아들 미스라임은 히브리어로 이집트를 가리키는 이름이며, 구스는 이집트 남쪽의 누비아 지역과 관련이 깊은 이름입니다. 셈의 아들 중에는 엘람, 앗수르, 아람이 있어 이 이름들이 곧 훗날 근동의 나라들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목록의 신학적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테네에서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라고 선포했습니다(행 17:26). 피부색과 언어와 문화가 달라도 우리는 한 조상에게서 나온 한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 족보는 인종 우월주의를 거부하는 성경적 근거이기도 합니다.
10장에는 눈에 띄는 인물이 몇 명 있습니다. 8~12절의 니므롯은 “세상에 첫 용사"로 소개되며,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 그리고 앗수르의 니느웨까지 나라를 일으킨 통치자입니다.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었다는 표현에 대해 헨리 모리스를 비롯한 여러 해석자는 니므롯을 바벨의 반역을 주도한 우두머리로 보았고, 이름이 “반역하다"를 뜻하는 “마라드"와 소리가 닮았다는 점도 흔히 거론됩니다. 또 14절의 가슬루힘에게서 블레셋이 나왔다는 설명은 훗날 이스라엘의 숙적이 될 민족의 뿌리를 알려 주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25절은 에벨의 아들 벨렉의 이름이 “나뉨"이라는 뜻이며 그때 “세상이 나뉘었다"고 기록합니다. 이 구절이 다음 장의 바벨탑 사건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렇다면 10장에서 민족들이 이미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나뉘었다고 한 것은 시간 순서가 뒤바뀐 것일까요? 아닙니다. 10장은 결과를 먼저 요약해서 보여 주고, 11장은 그렇게 흩어진 까닭을 되돌아가서 설명하는 구성입니다.
창세기 11장: 시날 평지의 바벨탑
11장 1절은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로 시작합니다. 홍수 직후 인류는 한 언어를 쓰며 한 무리로 살았습니다.
한 언어로 소통하는 인류는 서로 돕고 협력할 수 있었으니 그 자체로는 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은 받은 복조차 하나님을 거스르는 도구로 바꾸고 맙니다. 오늘날 인터넷과 첨단 기술이 같은 길을 걷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입니다.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만난 “시날 평지"는 훗날 바벨론이 자리 잡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하류의 넓은 충적 평야로, 오늘날 이라크 남부에 해당합니다.

3절은 이 땅의 건축 재료를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시날 평지는 강이 실어 온 흙으로 이루어진 땅이라 돌이 귀했습니다.
그렇다면 돌 대신 무엇을 썼을까요? 흙을 구워 벽돌을 만들고 역청, 곧 천연 아스팔트를 접착제로 쓴 것입니다. 이는 고고학자들이 메소포타미아의 건축물에서 확인한 사실과 정확히 일치하며, 팔레스타인의 돌 건축 문화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일부러 설명해 줄 만큼 낯선 방식이었습니다.


그들이 세우려던 “탑"은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 곧 계단식 신전탑과 같은 건축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바벨론에는 “에테멘안키”(하늘과 땅의 기초가 되는 집)라는 이름의 거대한 지구라트가 있었고, 느부갓네살 2세는 이 탑을 재건하며 기념 비문을 남겼습니다. 앤드루 조지는 2005~2006년 『동방학 기록』에 실은 논문에서 이 탑에 관한 설형문자 자료와 고고학 자료를 정리했습니다. 물론 11장의 탑이 에테멘안키와 같은 건축물인지는 확정할 수 없으나, 성경의 배경이 당시 메소포타미아의 실제 건축 문화였다는 점만큼은 분명히 확인됩니다.


이름을 내려는 사람들, 내려오신 하나님
바벨탑 사건의 핵심은 4절에 있습니다.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이 한 문장에는 두 가지 죄가 겹쳐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대신 자기 이름을 높이려는 교만이고, 다른 하나는 “흩어짐을 면하자"는 말에서 드러나는 불순종입니다.
9장 1절에서 하나님은 분명히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한곳에 모여 성을 쌓으며 그 명령을 거스르려 했습니다. “이름"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솀"인데, 셈(Shem)의 이름과 같은 소리입니다. 하나님이 셈의 이름을 크게 하시는 길(9:26)이 있는데도 사람들은 자기들의 힘으로 이름을 내려 한 것입니다.
본문에는 재미있는 반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탑을 쌓았다고 자랑했지만, 5절은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고 말합니다. 하늘에 닿겠다던 그들의 탑이 하나님께는 허리를 굽히고 내려와야 보일 만큼 작았다는 풍자가 담겨 있습니다. 7절에서 하나님이 “자, 우리가 내려가서"라고 복수형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1장 26절의 “우리"와 맞닿으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그림자로 읽어 온 해석이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을까요? 6절에서 하나님은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라고 하십니다. 죄로 물든 인류가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뜻으로 뭉치면 악도 하나로 증폭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언어의 혼잡은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홍수 이전과 같은 연합된 악을 막으려는 자비로운 제동이었습니다.
9절은 이 사건에 “바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이 이름을 “신의 문”(바브-일림)이라는 영광스러운 뜻으로 불렀지만, 히브리어는 “혼잡하게 하다"를 뜻하는 “발랄"과 소리를 맞추어 교만의 도시를 조롱합니다. 사도행전 2장 6절에서 큰 무리가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복음을 듣게 된 오순절 사건은 이 흩어짐을 거꾸로 돌려놓는 첫걸음이었고, 요한계시록 7장 9절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큰 무리가 보좌 앞에 서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셈의 족보에서 아브람으로
10~26절은 셈에서 데라에 이르는 족보를 간결하게 이어 갑니다. 셈부터 아브람까지 모두 열 세대로, 5장의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열 세대와 짝을 이룹니다.
이 족보에서 눈여겨볼 점은 수명이 급격히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셈은 600세를 살았고 아르박삿은 438세, 벨렉은 239세, 나홀은 148세를 살아 점점 짧아졌습니다. 홍수 이후 세상의 환경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이 숫자가 조용히 증언합니다.
더 흥미로운 점은 이 숫자를 단순히 더해 보는 것입니다. 11장 26절을 그대로 따라 데라가 일흔에 아브람을 낳았다고 계산하면, 노아는 아브람이 쉰여덟 살쯤일 때까지 살았고 셈은 아브라함보다도 오래 살았다는 결과가 나옵니다. 그렇다면 홍수를 직접 겪은 증인이 아브라함 시대까지도 살아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입니다. 홍수와 바벨탑의 기억이 지어낸 전설이 아니라 살아 있는 증인을 통해 전수된 역사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27절부터는 “데라의 족보"가 시작되어 이야기의 초점이 아브람에게 좁혀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람의 형제 하란은 아버지보다 먼저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고(11:28), 29~30절은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임신하지 못하여 자식이 없었다고 전합니다. 이 짧은 한 줄이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의 가장 큰 긴장을 만들어 냅니다.
한 사람을 통해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자식이 없는 노인 부부를 통해서입니다.


우르는 레너드 울리가 1920년대에 발굴하여 『칼데아의 우르』(1929)로 소개한 이후 널리 알려진 도시로, 달의 신을 섬기는 신전과 지구라트가 있던 곳입니다. 여호수아 24장 2절은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라고 증언하여 아브람이 우상 문화의 한복판에서 부름받았음을 알려 줍니다. 사도행전 7장 2~4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아브람이 하란에 살기 전, 곧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 이미 그를 부르셨습니다.
31절에서 데라는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우르를 떠나지만 중간의 하란에 이르러 거기 주저앉고 맙니다. 하란 역시 달신 숭배로 유명한 도시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가나안을 향하다가 하란에서 멈춘 데라의 모습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반쯤 따르다 안락한 곳에 눌러앉는 신자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과 같습니다. 이제 이 멈춰 선 자리에서 12장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음성이 울려 퍼질 차례입니다.

경륜으로 보는 창세기 8~11장과 장차 올 나라
스코필드의 구도에서 인간 통치의 시대는 8장 20절에서 열려 11장 바벨탑의 심판으로 막을 내립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의 인류에게 정부를 세워 질서를 지키게 하셨고,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도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슬러 한곳에 모여 이름을 내려다 실패했습니다. 찰스 라이리가 『세대주의』에서 정리한 대로 각 경륜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인간이 그것을 지키지 못하고 심판받는 과정을 되풀이합니다.

노아 이야기에는 세대주의 해석자들이 흔히 짚는 상징도 있습니다. 홍수 전에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 옮겨졌고 노아는 심판의 한가운데를 통과하여 보존되었는데, 일부 해석자들은 에녹을 휴거될 교회의 모형으로, 노아를 환난을 통과해 보존될 이스라엘의 모형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본문이 직접 말하는 내용은 아니지만, 예수님이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가 임하신다고 하신 말씀(마 24:37)과 함께 마지막 때의 구도를 생각하게 하는 단서입니다.
그렇다면 바벨탑이 남긴 흩어짐과 혼잡은 영영 그대로일까요?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답합니다. 스바냐 3장 9절은 하나님이 그때에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이 말씀은 재림하신 그리스도께서 천 년 동안 다스리실 때 언어와 민족의 분열이 치유되는 모습을 내다보게 하며, 인간 통치가 이루지 못한 평화를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소망을 품고 오늘의 본문을 읽습니다.
한 가지 더 기억할 점은 바벨탑이 인간 통치의 실패이면서 동시에 은혜의 새 단계로 넘어가는 문이라는 사실입니다. 흩어진 민족들 가운데서 하나님은 한 사람 아브람을 따로 부르시고,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얻으리라고 약속하십니다(12:3). 바벨에서 흩어진 모든 민족을 향한 복의 약속이 이렇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묵상과 적용
오늘 본문을 읽으며 가장 먼저 붙들고 싶은 말씀은 8장 1절의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사"입니다. 방주 안에서 노아는 오래도록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한순간도 그를 잊으신 적이 없었습니다. 혹시 지금 길고 어두운 방주 안에 계신 듯한 분이 계신가요? 취업이 늦어지거나 병상에서 회복이 더디거나 가정에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어서 하나님이 나를 잊으신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드실 때, 이 한 문장을 소리 내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노아의 기다림에서 배울 점이 있습니다. 노아는 마른 땅을 눈으로 보고도 하나님이 “나오라” 하실 때까지 방주 안에 머물렀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길이 보이면 서둘러 문을 열고 나가고 싶어 합니다. 이직을 결정할 때도 자녀의 진로를 정할 때도, 신앙 공동체 안에서 중요한 일을 앞두고도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는 시간을 가져 보십시오. 기다림은 시간의 낭비가 아니라 순종의 한 모습입니다.
구원의 큰 흐름 속에서 이 본문을 보면 은혜의 순서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노아가 요청하기도 전에 먼저 기억하셨고, 제단의 향기를 받으며 땅을 다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으며, 홍수 이후의 삶에 복과 명령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8장 21절이 말하듯 사람의 마음은 여전히 악합니다. 홍수가 마음을 씻지 못했다는 것은 외적인 환경이 바뀌는 것만으로는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오직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시작되는 중생, 그리고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성화만이 마음의 뿌리를 바꿉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은 그 순간부터 거룩해지는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었으니 이제 됐다"고 멈추지 말고, 받은 은혜 위에서 날마다 한 걸음씩 자라 가는 삶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 때문에 노아의 후반부 이야기는 우리에게 경고가 됩니다. 의인이라 불렸고 방주를 지었던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쓰러졌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은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말씀합니다. 큰 은혜와 큰 승리를 맛본 직후가 오히려 가장 위험할 수 있습니다. 사역에 성공한 뒤, 시험에 합격한 뒤, 오랜 고난에서 벗어난 뒤에 자신을 돌아보는 경계심을 잃지 마십시오.
가정에서의 적용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함은 아버지의 약점을 소문냈고 셈과 야벳은 조용히 덮었습니다. 부모의 부족함이나 가족의 허물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어느 쪽을 택하시나요? 직장 동료의 실수를 단톡방에 퍼뜨리기 쉬운 시대에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향기가 됩니다.
물론 덮는다는 것이 죄를 모른 척하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와 회복의 길을 열어 주되 사람의 수치까지는 드러내지 않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보이는 우리의 평소 태도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셈과 야벳이 아버지의 허물 앞에서 보여 준 조심스러움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닐 것입니다. 부모가 평소에 남의 약점을 대하는 방식이 곧 자녀가 배우는 방식이 됩니다. 오늘 식탁에서 누군가의 흉을 보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보십시오.
바벨탑의 교훈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더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우리 이름을 내자"고 외쳤고, 우리 시대는 SNS의 팔로워 수와 직함과 자산으로 이름을 내려는 열망으로 가득합니다. 신앙 공동체조차 예배당의 규모와 사역의 숫자로 이름을 내려는 유혹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12:2)라고 약속하십니다. 이름은 내가 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가장 크게 이름을 내고 싶은 영역이 어디인지 하나님 앞에서 적어 보시기 바랍니다.
9장 6절은 우리 사회에도 메시지를 던집니다. 사람의 생명이 존귀한 까닭은 능력이나 쓸모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성과로 사람을 줄 세우고 약한 사람이 쉽게 외면당하는 세상에서, 신자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아야 합니다. 10장의 족보가 알려 주듯 인종과 국적을 막론하고 우리는 한 조상에게서 나온 한 가족입니다. 우리 곁의 외국인 노동자와 이주민을 귀한 이웃으로 대하는 일부터 이 믿음을 실천해 보십시오.
그리고 무지개를 볼 때마다 이 약속을 떠올리십시오. 하늘에 걸린 일곱 빛깔은 하나님이 활을 내려놓으신 자리를 알려 줍니다. 구속사의 눈으로 보면 방주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그림자이기도 합니다. 방주에는 문이 하나뿐이었고(6:16), 예수님은 “내가 문이니”(요 10:9)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방주를 칠한 역청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코페르"가 속죄를 뜻하는 “카파르"와 같은 어근이라는 점을 들어, 많은 해석자들이 방주를 안팎으로 덮은 역청에서 십자가의 속죄를 읽어 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재림의 소망 안에서 살아갑니다. 베드로후서 3장은 옛 세상이 물로 멸망했듯 지금의 하늘과 땅도 불사름을 위해 보호되고 있다고 말씀하며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3:11)라고 묻습니다. 노아가 오랜 세월 방주를 지으며 의를 전파했듯, 우리도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거룩하게 살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노아의 때와 다르지 않은 이 시대에 방주의 문은 아직 열려 있습니다.
예화
카메론 타운센드: 바벨의 흩어짐을 거스른 한 청년
바벨탑 사건 이후 사람들은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장벽을 넘어 모든 민족이 자기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려고 평생을 바친 사람이 있습니다. 위클리프 성경번역선교회의 창립자 윌리엄 카메론 타운센드입니다. 1896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 시절 학생자원운동의 영향을 받아 선교에 헌신했고, 1917년 스물한 살의 나이로 중앙아메리카 과테말라에 건너가 스페인어 성경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고원 지대의 원주민 카크치켈 사람들에게 스페인어 성경은 닫힌 책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 날 한 원주민이 이런 뜻의 말을 건넸다고 전해집니다. “당신의 하나님이 그렇게 위대하다면 왜 우리 말은 하지 못하시나요?”
이 한마디가 젊은 선교사의 가슴을 찔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모든 언어를 아시는 분임을 믿었고,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말씀이 이 사람들의 말로도 쓰여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원주민 마을에 들어가 함께 살며 문자도 없던 카크치켈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작업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낯선 문법과 발음을 익히고 글자를 만들며 마을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까지 수년이 걸렸습니다. 마침내 1929년 카크치켈어 신약성경이 완성되어 세상에 나왔고, 사람들은 처음으로 자기 말로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경험은 이후 큰 흐름을 낳게 됩니다. 1934년 그는 아칸소의 시골에서 소수의 학생과 함께 언어 훈련 과정을 열었고, 이것이 훗날 위클리프 성경번역선교회와 국제 언어학 연구소로 발전하여 아직 성경이 없는 수많은 언어권으로 번역자들을 보내는 사역이 되었습니다.
타운센드의 생애는 제임스 헤플리와 마티 헤플리 부부가 쓴 『엉클 캠』(1974)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가장 위대한 선교사는 모국어로 된 성경이라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바벨에서 흩어진 말들이 오순절에 다시 복음 안에서 들리기 시작했듯, 한 선교사의 순종은 지금도 그 흩어짐의 장벽을 하나씩 허물고 있습니다.
한글 성경과 만주의 서생들
우리 한국 교회에도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존 로스 선교사는 만주 선양(당시 봉천)에서 한국 상인과 청년들을 만나 한글을 배웠고,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같은 한국인 조력자들과 함께 성경을 한글로 옮기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그 결과 1887년 한글 신약성서 『예수셩교젼셔』가 완성되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된 첫 신약전서입니다.

번역된 성경은 국경을 넘어 한국으로 들어왔습니다. 서상륜을 비롯한 권서인들이 성경을 짊어지고 압록강을 건너 황해도 소래 마을 같은 곳에서 복음을 전했고, 외국 선교사가 입국하기도 전에 우리 땅에 신앙 공동체가 싹텄습니다. 이러한 경위는 민경배 교수의 『한국기독교회사』에도 정리되어 있습니다. 바벨의 흩어짐 속에 갇혀 있던 우리말이 하나님의 말씀을 담는 그릇이 된 순간이었습니다.


두 이야기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우리 손에 들린 성경은 누군가의 눈물과 수고로 우리말이 된 책입니다. 그 말씀을 얼마나 귀하게 읽고 있나요? 또 아직 자기 말로 성경을 읽지 못하는 민족들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기도
오늘은 먼저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한 번도 잊지 않으셨음을 믿고,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게 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은혜로 시작된 구원이 우리 안에서 날마다 성화로 이어져 마음의 뿌리까지 새로워지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가정을 위해서는 서로의 허물을 폭로하지 않고 사랑으로 덮어 주는 가족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자녀들이 이름을 내려는 세상의 경쟁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이름과 사명을 붙들고 자라나도록 간구드립니다.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는 건물이나 규모가 아니라 말씀과 순종으로 세워지는 교회가 되기를, 우리나라를 위해서는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풍조가 멈추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받기를 기도합니다. 열방을 위해서는 아직 자기 언어로 말씀을 듣지 못한 민족들에게 성경이 전해지고 번역자와 선교사들이 힘을 얻기를 간구드립니다.
노아의 방주를 닫으시고 또 여신 전능하신 하나님, 홍수의 심판 속에서도 한 가족을 기억하신 주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삶에도 방주 안에서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때로는 주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에도 주님이 나를 기억하고 계심을 잊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눈에 보이는 길이 열렸다고 서두르지 않고, 주님이 “나오라” 하시는 음성을 기다리는 순종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 고백합니다. 저에게도 노아처럼 큰 은혜를 입고도 넘어지는 약함이 있고, 함처럼 남의 허물을 쉽게 입에 올리는 습관이 있으며, 바벨의 사람들처럼 저의 이름을 높이고 싶은 교만이 있습니다. 이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사람의 마음이 어려서부터 악하다 하신 말씀 앞에서 저의 힘으로는 저를 고칠 수 없음을 인정합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노아의 제단에서 올라간 향기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켰음을 믿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향기로운 제물로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을 감사드립니다. 구름 속에 무지개를 두시고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 약속하신 주님의 언약을 기억하며, 그 신실하심에 기대어 오늘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성령님, 칭의의 순간에 시작하신 성화의 일을 제 안에서 날마다 이루어 가 주옵소서. 오늘 제가 만나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주님의 형상을 보게 하시고, 그들의 수치를 덮어 주는 사랑을 실천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름을 내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이 주시는 이름으로 만족하게 하시며, 바벨에서 흩어진 모든 민족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그날을 소망하게 하여 주옵소서.
노아의 때와 같이 다시 오실 주님, 우리를 깨어 있게 하시고 거룩한 행실과 경건 가운데 기다리게 하여 주옵소서. 아직 열려 있는 구원의 방주 문으로 더 많은 영혼이 들어오게 하여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홍수 후에도 사람의 마음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아브람을 부르시어 구원의 길을 이어 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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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퍼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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